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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4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1.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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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집안 오회분 4호묘(集安五盔墳四號墓) 널방 천장

 

4. 마상훈련

     

밤새워 기마대 1백 기를 이끌고 하가촌으로 달려간 하대곤은, 다음 날 이른 아침 종제 하대용의 저택에 당도했다. 동부의 기마병들은 일당백의 무술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이 부대를 이끄는 젊은 장수는 해평이었다.

“폐하! 동부욕살 하대곤이옵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대왕 사유 앞에 나타난 하대곤은 덥석 무릎부터 꿇었다.

“아니, 하 장군!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오?”

대왕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러 동부에는 자신의 전렵 출행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저녁 무렵 전령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밤새워 달려온 것이옵니다.”

하대곤은 고개를 꺾었다.

“동부의 군사 정보 전달 체계가 아주 잘 돼 있군! 지난 번 백제 원정 때 군사를 내지 않은 건 숙신이 도발할 위험이 있어서라 들었는데, 지금 동북쪽 변방은 어떠하오?”

대왕 사유는 은근히 하대곤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당시만 해도 숙신이 호시탐탐 국경을 노려온 것은 사실이오나, 지금은 경계를 튼튼히 하여 저들도 겁을 먹고 은인자중하고 있사옵니다.”

“다행이로군!”

대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하대곤 뒤에 시립해 서 있는 해평에게 가서 멎었다.

하대곤이 급히 일어서며 해평에게 일렀다.

“대왕 폐하시다. 어서 예를 갖추어라!”

해평이 대왕 앞으로 다가가 역시 무릎을 꿇었다.

“해평이 대왕 폐하를 뵙습니다.”

“제 미천한 자식이옵니다.”

하대곤이 말했다.

“음, 훌륭한 아들을 두었구려! 장차 하 장군 못지않은 큰 인물이 될 장재(將材)로다.”

대왕 사유는 해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들에게 동부의 기마대 훈련을 맡겼사옵니다.”

하대곤이 해평을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해평이라! ……헌데 낯이 매우 익은 듯하구나.”

대왕의 이 같은 말에, 순간 하대곤은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왕이 해평에게서 왕제 무의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까지 서늘해졌다. 해평은 아버지 무를 꼭 빼어 닮았던 것이다.

“오늘 처음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하대곤이 대신하여 말했다. 해평이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허헛, 참! 갑자기 아우 무가 생각나는구려. 무에게도 아들이 있다면 저처럼 훌륭한 장재가 되었을 터인데…….”

대왕은 이렇게 무심코 말했지만, 하대곤은 사뭇 가슴이 떨려왔다. 아무래도 해평을 데려온 것이 큰 실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평이 왕제 무의 아들임을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폐하, 망극하오이다!”

“아니로세. 무는 당시 연나라 볼모로 있는 태후와 왕후를 위하여 스스로 국경에서 사라지기로 작정한 것임을 잘 알고 있소. 허어, 아우 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보다 기마대를 이끌고 왔다 하니, 오늘은 마상훈련이나 해봅시다. 장군의 아들 해평의 무술 솜씨도 보고 싶고!”

대왕은 썩 기분 좋아 보였다. 해평을 대하자 왕제 무를 만난 듯 반가웠고, 이를 계기로 젊은 장수들의 무술시범을 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가 될 듯싶었던 것이다.

종마장 너른 들판으로 곧 군사들이 집결했다. 하대용은 추수로 하여금 상단을 훈련시킬 때 쓰던 각종 무술 훈련 장비들을 준비토록 지시했다.

전렵 행사는 단순한 사냥이 아닌 일종의 군사훈련이었으므로, 군대 사열과 전술훈련 및 마상훈련이 그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대왕 사유가 이끌고 온 국내성의 1천 군사가 사열과 전술훈련 시범을 보였다. 그 다음에 동부욕살 하대곤의 기마대 1백 기가 기마전술을 펼쳤다.

대왕 사유는 군대 사열을 통하여 고구려군의 사기충천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려고 했다. 동부옥살 하대곤이 펼쳐 보인 기마전술도 잘 조련된 기마대의 위용을 느끼게 해주어 자못 볼만했다.   

사열과 전술훈련은 단체지만, 마상훈련은 개인전술로 가장 기대가 되는 무술시범이었다. 마상훈련 참가자들은 모두 3개 조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대왕 사유가 이끌고 온 1천 군사 중 가려 뽑은 기마대와 동부욕살이 대동하고 온 기마대, 그리고 하대용 상단에서 말을 잘 다루는 청장년 등이었다. 이들 3개 조는 자연스럽게 무술시합을 벌이면서 긴장감을 더해갔다.

마상훈련은 말 타기, 활쏘기, 창술, 검술 등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말 타기와 활쏘기는 고구려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무예였다. 고구려 시조 추모대왕(朱蒙)은 말 타기와 활쏘기의 명수로 무사들 사이에 그 전통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왕자 이련도 마상훈련에 참가했다. 아직 열세 살의 나이지만,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이미 청년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국내성 군사들이 출전한 마상훈련에서 최종적으로 이련이 선발되었다. 대왕 사유는 매우 흡족한 눈으로 그런 아들을 바라보았다.

한편 동부에서는 해평이 대표주자로 나섰고, 하가촌에서는 추수와 또 한 명의 나이 어린 듯 해맑은 얼굴의 미소년이 출전했다. 미소년은 날렵한 몸매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개인기술은 대표주자들 모두 훌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말 타기에서 보여주는 개인기술은 추수가 월등한 편이었다. 그는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렸다. 말 등에서 한 순간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재주넘듯이 했다. 말 옆구리로 몸을 피해 이편 쪽에서 보면 말만 저 혼자 달리는 것 같았다.

마상훈련의 마지막 순서는 이련과 해평, 추수와 미소년 등 네 명이 벌이는 말 타기 경주였다. 저 멀리 언덕 너머에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깃발을 꽂아놓고 그곳까지 달려갔다가 대왕 앞까지 돌아오는 경기였다.

“우승을 하는 자에게는 짐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백마를 상으로 내놓겠다.”

고구려 무사들의 경기 모습을 보며 매우 흡족한 기분에 충일된 대왕 사유가 큰소리로 외쳤다.

대왕이 앉은 단으로부터 수평으로 금을 그어놓은 출발점 앞에서, 곧 네 명의 주자들은 기마대장의 깃발 신호와 함께 힘차게 말을 달렸다. 그들은 거의 엇비슷하게 수평을 이루며 달려 나갔다. 옆에서 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네 필의 말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질주했다. 주자들도 등자에 걸어 넣은 양발로 말의 뱃구레를 힘차게 걷어차며 채찍을 휘둘러댔다.

하늘은 티 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말은 숨넘어갈 듯 거칠게 땅을 박차며 달렸다. 아직 제대로 마르지 않은 땅이라서 말발굽에서 찍혀 나온 흙덩어리들이 공중으로 새카맣게 튀어 올랐다. 마른 땅이라면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 뒤에서 보면 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반환점인 삼족오기를 되돌아 중간 지점 쯤 달려왔을 때였다. 말 머리 두세 개 거리를 두고 추수와 해평이 앞서 달려 나갔고, 조금 뒤미처 왕자 이련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년이 달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다급한 마음에 이련은 급히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미끄러운 땅을 잘못 디뎌 말발굽이 뒤엉키면서, 그는 졸지에 낙마를 하고 말았다. 바로 뒤따라오던 미소년이 급히 비켜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말을 돌려 땅에 떨어진 이련에게로 달려왔다. 앞에 달리던 추수와 해평은 그런 사태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 순위를 다투면서 말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말에서 뛰어내린 미소년이 무릎을 꿇고 이련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미소년의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가 안 된 듯했다.

“아아, 다리를 다친 모양이오.”

이련은 다친 한쪽 다리를 감싸 쥐었다.

“잠시만 앉아계십시오.”

미소년은 달려가다 멈춘 왕자 이련의 말을 끌고 와 그를 부축해 안장 위에 태웠다.

그런 연후 자신의 말에 올라탄 미소년은 이련의 말고삐까지 잡고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천천히 대왕이 있는 단 앞까지 걸어왔다.

“어찌 된 것이냐?”

대왕이 왕자 이련에게 물었다.

“부끄럽습니다. 낙마를 하였나이다.”

이련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왕 폐하! 엊그제 내린 비로 땅이 제대로 마르지 않았사옵니다. 물기 덜 빠진 곳을 말이 밟아 미끄러진 것 같사옵니다.”

미소년이 이련을 대신하여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호오! 나이 어린 무사가 제법 의리가 있구먼.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대왕이 청년을 이윽히 바라보며 물었다.

“하연화(河蓮花)라고, 제 여식이옵니다.”

대왕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하대용이 대신 대답을 했다.

“오! 그래요? 짐은 나이 어린 청년인 줄 알았소. 하연화라, 그대는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리 뛰어난 무술을 익혔는가?”

대왕은 다시 하연화를 바라보았다.

“대왕 폐하! 제(齊)나라 안자(晏子)는 키가 비록 작지만 대인(大人)으로 나라의 큰 재상이 되었사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하는데 키가 작고 큰 것이 이유가 될 수 없듯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술 또한 남녀의 구분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소녀의 소견이옵니다.”

하연화의 말에 대왕은 크게 놀랐다.

“그대가 안자를 아는가?”

“스승이 가르쳐주셔서 경서를 조금 읽었사옵니다.”

하연화가 말한 스승은 바로 하대용 옆에 앉아 있었다.

“문무를 겸하였도다. 과연 훌륭한 낭자로고. 스승의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

대왕의 물음에 하대용이 대답했다.

“바로 여기 있는 을두미(乙杜彌) 사부이옵니다.”

하대용 옆에 앉은 을두미가 조용히 일어나 대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을두미 선생! 과연 두루미처럼 고귀한 상을 가지셨구려! 혹시 을두지(乙豆智)나 을파소(乙巴素)의 자손이 아니시오?”

대왕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폐하! 바로 맞추셨사옵니다. 을두미 사부는 저 대무신왕 시절 잉어계책으로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좌보 을두지와, 고국천왕 때 진대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휼한 명재상 을파소의 피를 이어받았사옵니다.”

역시 하대용이 대신 답을 올렸다.

“허, 그러하시오?”

대왕은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주억거렸다. 을두미는 고고한 자세로 조용히 미소만 지어보였다. 하대용의 말에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을두미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희고 긴 머리와 수염이 흑백의 대비를 이루었다. 검은 옷은 그가 무술도장에서 입는 무도복이었다.

그날 말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을 한 무사는 해평이었다. 추수와 말 머리 하나 차이로 선두를 지켰다. 대왕은 약속한대로 해평에게 백마를 상으로 주었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말을 상으로 내리면 어찌하옵니까? 그러하면 저희 종마장에서 기르던 명마를 폐하께 헌상하겠나이다.”

하대용은 추수로 하여금 길이 잘 든 ‘한혈마’를 대령케 했다. 잠시 후 추수는 호피 말안장을 얹은 적토마 한 필을 끌고 왔다. 검붉은 털빛이 윤기를 내고 있었으며, 바람에 날리는 갈기가 매우 부드러웠다.     

“허허! 관운장의 적토마가 바로 여기 있었구려!”

“맞사옵니다. 관운장이 타던 말은 아마도 저 서역 대원의 한혈마가 틀림없을 것이옵니다. 이 말 역시 한혈마로, 족보를 가진 명마이옵니다. 이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리는데, 한창 빨리 달릴 때는 귀밑에서 땀과 피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한혈마’라 하옵니다.”

하대용의 설명에 대왕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마상훈련이 끝나갈 무렵, 어느 새 석양이 서쪽 산 능선에 걸려 종마장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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