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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3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1.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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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청룡과 백호

3. 왕제 무(武)   

 

날이 밝았다. 언제 폭우를 퍼부었느냐 싶게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하대용은 일찌감치 일어나 수하 중에서 무술도장의 사범으로 있는 말 잘 타는 추수(秋手)를 불렀다. 상단의 장정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이 하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압록강변에 있었는데, 간밤에 호자무를 시켜 몰래 그를 자택으로 불렀던 것이다.    

“너, 급히 책성에 좀 다녀와야겠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뒷문으로 빠져나가거라.”

하대용은 새벽에 일어나 하대곤에게 쓴 서찰 하나를 추수에게 건네주었다.

추수는 허리를 굽히고 곧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게 나는 듯 말에 올라 동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새벽 들판을 달리는 말과 추수는 마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듯 바람처럼 날아갔다. 말의 네 다리는 땅에 닿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네 다리의 율동적인 박자가 땅 바로 위의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그 역시 말의 박자에 맞춰 고삐 잡은 두 팔을 놀렸고, 등자에 발을 의지한 두 다리가 말의 옆구리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말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가슴에서도 같은 속도와 크기로 뛰놀았다.

추수는 말갈족이었다. 그 먼 조상은 북방의 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이었다. 그의 말 타는 실력은 조상 때부터 알아주던 것이었다. 말갈 부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북방 유목민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세력의 추장 노릇을 했는데, 그들 간의 세력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일족이 거의 몰살되었다는 것이다. 겨우 그의 아버지가 살아남은 가족을 데리고 도망쳐 태백산 자락에 숨어들어 짐승을 잡아 가죽을 파는 사냥꾼 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는 태백산 아래 개마고원에서 잔뼈가 굵었다. 어린 시절부터 말 타고 산야를 누비며 사냥하는데 이골이 나서 말달리기, 활쏘기, 창던지기, 표창 날리기, 검술 등 모두 수준급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개마고원의 말갈부락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으로 소문난 그는, 호랑이며 곰이며 담비 등을 사냥해 그 가죽을 하대용 상단에 팔아넘기는 일을 했다.

추수의 비범한 사냥 솜씨는 물론 각종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하대용은 그를 자신의 상단에 끌어들였다. 초원을 통한 상단의 이동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적 떼들을 만나게 되면 값비싼 귀중품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상단에 소속된 행상들은 저마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하대용은 추수를 무예 가르치는 사범으로 들어앉히고, 상단 청장년들의 무술 연습을 시켰다. 그동안 함께 여러 차례 서역을 다녀온 하대용은 도중 상단이 마적 떼와 맞닥뜨렸을 때 그가 보여준 무술 실력을 보고 크게 신뢰하게 되었다. 그가 말을 달리면서 손을 휘저을 때마다 폭풍에 쓸리는 나뭇잎처럼 마적들이 맥을 못 추고 쓰러졌던 것이다.

추수는 바람처럼 말을 달렸다. 말 타기에 뛰어난 군사들도 하루 종일 걸리는 거리를 그는 한나절 남짓 달려 동부의 산성에 도착했다. 고구려 동북부의 거성인 책성이었다. 동부욕살 하대곤은 이 성에서 서북쪽 경계의 부여와 동북쪽 경계의 숙신을 견제하며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종제 하대용이 보낸 추수를 한눈에 알아본 하대곤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추수는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숨을 헐떡이며 품속에서 하대용의 서찰을 꺼내 하대곤에게 건넸다.

서찰을 급히 읽어본 하대곤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전렵 나온 군사가 얼마나 되더냐?”

“1천 군사는 된다 들었사옵니다.”

“무어라? 1천 군사?”

하대곤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군사 1천이라면 전렵 행차가 아니었다. 하대용이 서찰을 통해 알려준 대로, 이것은 전렵이라기보다는 두 해 전에 백제와의 전투에 군사를 보내지 않은 동부에 대한 견책의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장군, 어찌 하오리까?”

이제는 숨을 제대로 돌린 추수가 물었다.

“너는 즉시 말을 달려 하 대인에게 가서 알려라. 오늘 저녁에 거대하게 주연을 베풀어 대왕 폐하를 극진히 모시고, 군사들에게도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게 하라. 나는 대왕 폐하를 알현하러 내일 새벽까지 가겠다.”

“따로 긴히 전하실 서찰은 없으신지요?”

“그럴 시간이 없다. 어서 가거라!”

하대곤은 쫓다시피 추수를 돌려보냈다.

추수를 보내고 나서 하대곤은 성안을 거닐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니야.’

하대곤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처음 종제 하대용의 서찰을 접했을 때는 대왕 사유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서두를 문제가 아니었다. 전렵 행차에 군사 1천을 이끌고 왔다면, 대왕은 이미 국내성에 예비 병력을 남겨두고 일단 유사시 구원군을 보낼 수 있도록 방비해놓고 있을 것이었다.

하대용의 서찰에 의하면, 태자 구부는 국내성에 남겨두고 둘째왕자 이련을 대동했다고 한다. 대왕 사유가 백제를 치기 위해 직접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태자 구부의 능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부는 장대한 기골에 뛰어난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미 태자로 책봉되기 전부터 부왕을 모시며 정사를 도왔고, 원정 때는 국내성을 지키면서 혹시 백제와의 전쟁을 빌미로 북방 세력이 국경을 침범할 것에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변경의 성주들에게 파발마를 띄우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대곤은 수양아들인 해평(解平)을 내실로 불렀다. 나이 스무 살의 건장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음, 그래! 게 앉아라.”

하대곤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군사 조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을 기해 종마장으로 갈 것이니, 마상훈련에 능한 기마대 1백만 가려 뽑아 대기시켜라.”

말을 마친 하대곤은 한 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네, 아버님!”

해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대곤의 말은 곧 명령이었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평이 나가고 나자, 하대곤은 곧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해평은 그에게 있어 큰 희망이자, 또한 그것 이상의 큰 근심거리이기도 했다. 주군으로 모셨던 왕제 무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대곤은 왕제 무야말로 제왕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주군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다음부터 그는 늘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는 전쟁의 신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무술과 기발한 전략을 구사하는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고구려를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될 면모를 갖추었으나 시절을 잘못 타고난 것이 그에게 불운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연나라 모용황이 쳐들어왔을 때 무가 대왕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처럼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연나라 대군이 고구려군의 역습에 대패하여 쫓겨 달아나기에 바빴을 것이라고 하대곤은 생각했다.     

고구려가 연나라 대군에게 공격을 당해 참을 수 없는 치욕을 겪은 것은, 대왕 사유가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12년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중원의 동쪽 변방에 근거지를 마련한 선비족은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고 있어 요동 지역을 두고 밀고 당기는 패권을 다투어왔다. 당시 선비족은 모용선비·단선비·우문선비 등으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은 모용선비였다. 미천왕은 모용선비와 요동 지역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고구려의 강성한 위용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용선비는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모용선비의 모용황이 세력을 규합하여 연나라를 세우면서부터 고구려를 위협하는 서북방 최대의 강적으로 떠올랐다.

연나라는 요하(遼河) 서쪽에 자리한 용성(龍城)에 수도를 정했는데, 이는 중원으로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고구려였다. 배후에 고구려를 두고 중원을 공략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고구려를 제압한 후 중원을 도모하고자, 연나라는 수도를 용성에 정한지 1개월만인 342년 11월에 군사를 일으켰다. 모용황은 선대부터의 숙적인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사 5만 5천을 모았으며, 군사전략에 뛰어난 형 모용한(慕容翰)을 입위장군(立威將軍)으로 삼아 출정했다.

이때 모용한은 작전회의를 열고 휘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를 치는 길은 북로와 남로 두 갈래가 있다. 북로는 평탄하고, 남로는 험준하다. 적들은 필시 우리가 북로를 택하여 공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그 길을 굳게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군을 이끌고 남로로 가고, 적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 병력만 북로를 통해 진군토록 한다.”

그 전략에 따라 모용황은 형 모용한과 함께 손수 군사 4만을 이끌고 남로를 택해 진군했다. 그리고 모용한의 휘하 장수인 왕우(王寓)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이끌고 북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입하도록 했다.

연나라 군사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전법을 제대로 사용했다. 일단 남로로 가는 대군은 소문나지 않도록 비밀리에 험준한 산길로 진군시키고, 북로로 남하하는 적은 수의 군사들에게는 요란하게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보무당당하게 대로로 행군토록 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소문을 내며 진군시켜 고구려 군사들로 하여금 연나라 대군이 북로를 통해 원정길에 나섰다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고구려의 경우 연나라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긴급히 대책을 논의했다. 대왕 사유는 왕제 무로 하여금 정병 5만을 이끌고 나가 북로를 통해 진군해 들어오는 연나라 군대를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남로를 그냥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대왕이 손수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만약에 그 길로 쳐들어올지도 모를 적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대왕 사유의 판단은 빗나갔다. 험준한 산맥을 타고 넘어온 연나라 대군은 고구려의 적은 군사들을 일거에 진압해버렸다. 여기서도 모용한은 허허실실의 전법을 구사하여 고구려군과 맞닥뜨렸을 때 처음에는 전투를 하는 척하다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모용황이 이끄는 대군을 숨겨두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추격해오자 급물살 터지듯 돌격을 감행하여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때 대왕 사유는 단지 호위 군사 몇 명만 거느리고 도주하기에 바빴으며, 왕도를 버리고 단웅곡(斷熊谷)에 이르러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연나라 대군은 곧바로 환도성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연나라 장수 모여니(慕與埿)는 고구려의 태후와 왕후를 사로잡았다.

한편 고구려의 정병 5만을 이끌고 북로의 길목을 지키던 왕제 무는 연나라 장수 왕우가 이끄는 1만 5천 병력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때 고구려 대장군 무는 연나라의 허허실실 전법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5만 대군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1만 5천밖에 안 되는 연나라 군사를 무찔렀을 뿐이었다.

“우리가 속았다. 환도성이 위험하다. 전 속력으로 회군한다.”

왕제 무는 5만 군사를 휘몰아 환도성을 향해 달렸다.        

그 무렵, 이미 환도성을 점령한 모용황은 고구려 대왕이 숨어 있는 단웅곡으로 군사들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대왕은 깊은 산중에 꼭꼭 숨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구려 대왕의 항복을 기다리던 모용황은 북로를 택하여 진군하던 연나라 군사 1만 5천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경실색하여 군사를 거두어 환국하려고 했다.

이때 장수 한수(韓壽)가 모용황에게 간했다.

“지금 이대로 군대를 물린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북로에서 우리 군을 물리친 고구려군 5만의 병력에게 추격당할까 두렵습니다. 남로에서 우리 대군에게 쫓겨 달아난 고구려 군사들까지 수습하여 합세한다면, 우리 군사는 앞뒤로 적을 두는 진퇴양난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허면 어찌하는 것이 좋단 말인가?”

모용황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구려왕의 아비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싣고 간다면 감히 추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왕의 생모와 비까지 사로잡은 데다, 나포된 고구려 백성들 5만을 인질로 방패삼아 끌고 간다면, 적들은 화살 하나 날리지 못한 채 추격할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핫, 핫핫핫! 그것 참 좋은 꾀로다!”

한수의 말에 모용황은 호탕하게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모용황은 이렇게 하여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수레에 싣고, 사로잡은 태후와 왕후를 볼모로 삼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고구려 5만의 백성을 인질로 잡아 대군의 행렬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기병들로 하여금 닦달케 하면서, 연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대군의 추격을 막았다.

왕제 무가 후퇴하는 연나라 대군을 추격하려 했으나, 고구려 5만의 백성들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고, 볼모로 잡힌 태후와 왕후의 목숨도 달려 있는 문제라 군사를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고구려 북쪽 경계까지 추격했으나, 끝내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연나라 대군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결국 고구려 대왕 사유는 속수무책으로 연나라 모용황에게 씻지 못할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때 왕제 무는 땅을 치며 한탄했다. 차라리 연나라 군사를 대적하러 나가지 않고 환도성을 지키며 장기 농성에 돌입했다면, 적은 시일이 경과할수록 지치고 허기져 패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왕제 무는 성을 방어하는 전략으로 나가자고 했으나, 대왕 사유가 나가 싸우기를 주장하는 바람에 적의 허허실실 전법에 걸려들었다. 그것이 무로서는 못내 안타까웠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343년 2월에 대왕 사유는 왕제 무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부왕 미천왕의 시신과 볼모로 잡힌 태후와 왕후를 모셔오도록 명한 것이었다. 이때 무의 부장이던 하대곤도 사신단의 일원으로 따라갔다.

고구려 사신으로 간 왕제 무는 모용황 앞에서 당당했다. 스스로 칭제(稱帝)를 하는 모용황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했으나, 왕제 무는 남의 나라 선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강탈해가는 것은 유교의 덕목에 어긋난 한갓 모리배의 짓임을 강조했다. 그런 모리배에게 예를 갖출 수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 말에 모용황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천왕의 시신만은 내어주기로 했는데, 볼모로 잡혀 있는 태후와 왕후는 끝내 풀어주지 않았다.

모용황은 왕제 무가 고구려 땅에 있는 한, 태후와 왕후를 영원히 연나라 땅에 묶어둘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만약 볼모를 풀어주면 언제 다시 고구려가 왕제 무를 앞세워 연나라를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모용황은 전술전략에 뛰어난 왕제 무를 두려워했다.

연나라 수도 용성을 떠난 왕제 무가 고구려 국경에 당도했을 때였다.

“이제부터는 그대가 부왕의 시신을 모시고 가게.”

하대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무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왕제 전하께선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하대곤은 왕제 무의 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다.

“너도 모용황의 말을 듣지 않았느냐? 나는 앞으로 고구려 땅을 절대 밟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내가 고구려에 없다는 사실을 연나라에 알리도록 해라.”

왕제 무의 이 같은 말은, 그래야만 태후와 왕후가 볼모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됩니다. 주군!”

하대곤은 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군이라니! 네 주군은 하나다. 대왕 폐하가 계시지 않느냐? 네가 나 모르게 역심을 품고 있었단 말이더냐? 하늘이 무섭다. 죽음이 두렵거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거라.”

왕제 무는 하대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는 사신 일행이 없었고,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그날 밤새도록 왕제 무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하대곤은 결국 그와 함께 귀국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하대곤은 미천왕의 시신을 모시고 온 후, 우유부단한 대왕 사유를 폐위시키고 왕제 무를 제위에 오르게 할 작정이었다. 고구려가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왕성을 포기하고, 태후와 왕후를 버리고, 백성까지 적의 수중에 방치한 채 자기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는 파렴치한 군주는 이미 제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그는 단정했다. 더구나 연나라와의 전쟁 이후 백성들 사이에 대왕 사유에 대한 원망이 자자했으며, 그 반면에 왕제 무에 대해서는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백성들 모두가 원하는 군주는 바로 왕제 무였던 것이다.

하대곤의 역심은 그 이후에도 마음속 깊이 간직되어 있었다.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왕제 무가 고구려 국경에서 사라진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열 살 안팎의 소년이 하대곤을 찾아왔다. 바로 해평이었다. 그의 손에는 왕제 무의 서찰이 들려져 있었다.

‘내 아들이네. 당시 나는 고구려 국경에서 부여 땅으로 가서 해씨 마을을 찾았다네.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의 자손들이 세가를 이루며 사는 곳이네. 그때부터 나는 고씨 성을 버리고 해씨 성으로 행세를 했네. 내 아들을 그대에게 보내니, 고구려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인물로 키워주게. 나는 아직 아들에게도 고구려 왕손임을 이야기하지 않았네. 그러니 그 점을 특히 비밀로 해두기 바라네. 이후 나를 찾을 생각일랑 말게. 나는 단군왕검께서 그러하셨듯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다 산신이 될 생각이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러나 왕제 무의 아들 해평을 보고 하대곤은 오래도록 품어왔던 역심이 다시 발동했다. 일단 양자로 받아들여 ‘하해평’이라 불렀지만, 무의 아들인 그를 고구려의 강력한 군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굳히게 된 것이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만, 언젠가는 그날이 오리니…….”

동부욕살 하대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주군으로 생각해온 왕제 무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는 두 손을 움켜쥔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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