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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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2
  • 엄광용 전문 기자
    엄광용 전문 기자 novelky@hanmail.net
  • 승인 2021.10.2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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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현무, 약수리 벽화고분(藥水里壁畵古墳) 널방 북벽

1장/천제(天祭)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자, 뜰로 나온 하대용은 추녀 끝으로 들이치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밤의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황룡과 흑룡이 서로 뒤엉켜 싸우면서 먹장구름을 뚫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는 뇌성벽력이 치며 하늘이 갈라지고 용들의 꼬리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심상찮은 날씨로군!”

하대용은 양 소매 속에 손을 넣어 팔짱을 끼면서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때 비를 흠뻑 뒤집어쓴 사내가 급히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말 관리를 맡고 있는 호자무(毫慈茂)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깊은 눈과 우뚝한 코를 갖고 있었다. 일찍이 하대용이 서역과 말 교역을 할 때 대원(大宛: 페르가나)에서 데리고 온 말 조련사로, 벌써 10여 년 이상 집사로 두고 일을 시켰다.

“말들은 다 넣었느냐?”

“네, 대인 어른!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바람에 일부 말들이 비를 맞긴 했으나, 모두 안전하게 마구간에 가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천둥벼락에 놀라는 말이 없도록 방비하고, 마구간에도 빗물 새는 곳이 있는지 살펴 보거라.”

어련히 알아서 방비를 했을 테지만, 하대용은 간밤의 꿈이 뒤숭숭해 노파심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려놓으십시오, 대인 어른! 관리사들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습니다.”

호자무는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빗속을 뚫고 그의 숙소인 객사 뒤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대용은 빗속에서도 뛰지 않고 천천히 사라지는 호자무의 뒷모습에 한동안 시선을 박아두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음직스럽고 충직한 사내였다.

두 사람은 북방 초원로를 통해 대원과 한창 말 교역을 하던 시절에 만났다. 하대용의 나이 서른 중반 때였고, 호자무는 당시 채 스무 살이 안 된 청년이었다.

어린 시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호자무는 대원의 한 초원 종마장 주인을 만나 호구를 해결했다. 그 종마장에서는 대원의 명마인 한혈마(汗血馬)를 키우고 있었다. 한창 질주할 때 피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한혈마’라 부른다고 했다. 말의 뒷목과 어깨 사이의 피하조직에 기생충이 서식하는데, 한창 말이 질주할 때면 그 부위의 혈관에 창구(瘡口)가 생기면서 땀과 피를 흘린다는 것이었다. 하루 4백 리를 능히 주파한다는 명마였다. 이 한혈마는 당시 소그드 상인들을 통해 서역으로 많이 팔려나갔다. 또한 동으로는 사막 길을 통해 중원 땅에, 그리고 초원로를 통해 고구려에 전해졌다.

태백산에서 나는 초피(貂皮: 담비가죽), 호피(虎皮) 등 고구려 특산물을 말에 싣고 초원로를 통해 서역과 교역하던 하대용은 특히 대원의 한혈마에 관심이 많았다. 말은 짐을 실어 나르거나 수레를 끄는 데도 쓰였지만, 특히 군사용으로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는 대원에서 한혈마를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종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호자무를 고구려로 데려왔다. 종마장에서는 대량으로 말을 기르는 일도 하지만, 종자를 개량하여 고구려 산악지형에 맞는 명마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폭우가 쏟아지자 봄기운을 되찾던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을씨년스러운 마음에 하대용이 방안에 들어가 따끈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대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인 어른! 얼른 나와 보십시오!”

비를 흠뻑 뒤집어쓰고 뛰어 들어온 꼴머슴이 급히 달려와 대청마루 밑에서 소리쳤다.

“밖에 웬 소란이냐?”

“말을 탄 군사들이 대인 어른을 급히 찾습니다.”

“뭐라고?”

하대용은 문득 간밤의 꿈자리를 떠올렸고, 뭔가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는 급히 가죽신을 꿰어 신고 대문간으로 뛰어나갔다.

“안녕하시오, 하 대인?”

기마대장이 하대용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니, 장군께선? 전에 명마를 고르려고 우리 종마장에 오신 적이 있었지요?”

하대용은 뜻밖이지만 반갑게 맞았다.    

“곧 대왕 폐하의 전렵 행렬이 이곳에 당도할 것이오. 서둘러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고, 군사들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토록 해주시오.”

기마대장이 숨을 급히 몰아쉬며 소리쳤다. 그 뒤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기마병들도 숨을 고르느라 헐떡거렸고, 말들도 투레질을 하고 머리를 흔들며 빗물에 흠씬 젖은 갈기를 털어냈다.

“대왕 폐하의 전렵 행렬이오?”

“급하니 서두르시오.”

기마대장은 명령하듯 말을 툭 던져놓고, 다시 왔던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뒤돌아서자마자 빗속으로 질주하는 말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빗줄기는 눈앞을 가릴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대용은 마음이 급했다. 집안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발 멀쩡한 사람들은 다 불러 모아 대왕의 전렵 행렬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여자들은 대왕이 머물 방을 단장하고,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에서 손발을 재게 놀렸다.

하대용의 저택을 필두로 그 좌우와 뒤편으로 민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서 있었는데, 모두 하씨(河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하대용과 10촌 내외의 일가붙이들이 살고 있어, 주위에서는 이곳을 ‘하가촌(河家村)’이라 불렀다. 하대용 저택뿐만 아니라 하가촌 전체가 떠들썩하여,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왕의 전렵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뒤채에 들어가 쉬려던 호자무도 다시 뛰어나와 종마장으로 달려갔다. 말을 관리하는 일꾼들을 풀어 마초 창고를 깨끗이 치우도록 했다. 비에 젖은 군사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대왕의 전렵 행렬에 참가한 기마들이 머물 수 있도록 비어 있는 마구간도 깨끗이 청소하라 일렀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에 대왕의 전렵 행렬이 종마장으로 들이닥쳤다. 하대용은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나와 대왕의 어가를 맞았다. 그의 안내를 받아 대왕 일행은 급히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교군꾼들은 뜰 위에 어가를 걸쳐놓아 대왕이 비를 맞지 않고 바로 처마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어가 장막으로 비바람이 들이쳐 대왕의 모습은 머리에 관을 썼을 뿐,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한편 호자무는 기마대와 보병들을 종마장으로 안내했다. 그는 비를 맞아가며 일꾼들을 독려하여 기마대의 말들을 비어 있는 마구간으로 끌어들이도록 했고, 군사들로 하여금 아직 푸른 싹이 돋지 않은 너른 잔디밭에 서둘러 군막을 치도록 했다. 금세 1천여 군사들이 종마장 너른 들을 가득 메웠다. 군사들이 군막을 다 설치했을 즈음에야 동쪽 하늘부터 뿌옇게 개기 시작했다.

대왕 사유가 비에 젖은 용포를 새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좌정했을 때, 조촐하게 차려진 주안상이 들어왔다. 안주로 올라온 고기 접시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하대용이 대왕에게 술을 따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차린 것이 별반 없사옵니다. 곧 서둘러 수라상을 제대로 준비해 올리겠나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안상으로는 훌륭할 정도로 보기만 해도 맛깔스런 안주들이 한 상 가득 올라와 있었다.

“하 대인, 그 사이 어찌 이렇게 훌륭한 음식들을 준비하셨소?”

대왕은 하대용이 따라주는 잔을 받았다.

“자양강장제로 쓰이는 호골주이옵니다.”

“호오, 이곳에선 호랑이가 많이 사는 태백산과 가까우니 호골주까지 맛보게 되는구려. 하 대인 덕에 귀한 술을 대하니, 비를 맞아 떨던 몸에 뜨거운 피가 도는 듯하구려!”

호골주를 한 잔 비운 대왕은 날씨로 구겨졌던 감정까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되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대용은 두 손을 가슴으로 모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곳이 하가촌이라 들었소. 언제부터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는지 궁금하구려.”

대왕이 물었다.   

“폐하! 하씨 가문은 우리 고구려 동명성왕의 외조부인 하백(河伯) 선조의 피를 이어받았사옵니다.”

“호오! 그래요?”

대왕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오래 전부터 압록강 인근에는 많은 하가들이 모여 살며 세가를 이루고 있사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인이 말 장사를 하면서 종마장을 만들고, 그에 따른 인력들이 필요해 끌어들인 것이옵지요.”

“흐음, 말을 많이 기르는 모양이구려.”

“한 천여 두정도 되옵니다.”

“대단하오.”

“과찬이시옵니다.”

하대용은 은근슬쩍 흡족해 하는 대왕의 용안을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은근히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동부욕살인 종형 하대곤이 걱정되어서였다. 두 해 전 대왕이 백제를 치러갈 때 동부에선 군사를 내지 않았다. 동부의 거성인 책성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부여와, 동북쪽의 숙신을 경계해야 하므로 군사를 동원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댔던 것이다. 아무래도 대왕이 갑자기 전렵을 나선 것은 동부의 군사들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하면 동부욕살 하대곤에게 징벌이 가해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대용은 종형 하대곤의 반골 기질을 잘 알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하대곤은 옛날 왕제 무의 부장으로 연나라 모용황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큰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는 다음해에 왕제 무가 이끄는 사신단을 따라 연나라에 갔다. 그때 연나라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보내고 태후와 왕후는 그대로 볼모로 묶어두었다. 이에 왕제 무는 고구려 국경에서 부장 하대곤으로 하여금 미천왕의 시신을 모시고 국내성으로 향하게 한 후 자신은 귀국하지 않았다. 그때 왕제 무는 고구려 국경에서 혼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대곤은 미천왕의 시신을 고구려로 모시고 온 공과를 인정받아 소부와 대부를 거쳐 마침내는 동부를 대표하는 욕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왕제 무와 고구려 국경에서 헤어진 데 대한 불만이 깊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하대곤으로 하여금 반골 기질을 싹트게 한 것임을 종제인 하대용으로서 모를 리가 없었다.

갑자기 일기가 사나워 대왕의 전렵 행렬이 들이닥친 그날, 하대용이 밤새도록 뒤치락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종형 하대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하씨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라 생각했던 것이다.

대왕이 태백산으로 전렵을 떠난다면 반드시 사전에 동부욕살에게 통기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절 그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전렵 행렬이 들이닥쳤다. 만약 동부욕살 하대곤이 대왕의 전렵 행사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종제인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야.’

하대용은 간밤의 꿈을 되새기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아직 문밖의 바람소리는 나뭇가지 끝에 찬 기운을 매달아놓고 있었다. 가지 끝의 빗물은 곧바로 얼어붙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끼리 부딪쳐 댕강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대용은 을씨년스러운 기분에 이불자락을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밤에 꾸었던 황룡과 흑룡이 싸우던 꿈을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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