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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에게 가고 나 그대에게 오고』 - 23

윤한로 시인
  • 입력 2021.09.17 08:17
  • 수정 2021.09.1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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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隱花)

 

서녘에 해는 노루 꼬리만큼 남았는데 남자는 옹기짐을 지고 아낙네는 얼라를 업고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이고 구불구불 솔맹이 긴 고갯길 오릅니다 아직 시오리는 더 가고 게서 곁길 접어들어 초군길 자욱 더듬어서도 한참 그제야 비로소 마을에 닿습니다 마을이래야 헛간 몇 채와 오막살이 칠팔 호가 고작 그 곁으로는 옹기 가마가 기다랗게 누워 있는 점말 숯말로 천주교 교우촌입니다, 그곳에서 하루 나물죽 두 끼로 때우며 천주를 위해 조석으로 기도하고 사주 구령에 열심히 힘쓰니 나날이 행복합니다, 둠벙골 느더리 정삼이골 삼박골 새미랑이 베티 먹방이 그런 정겨운 마을 깊숙이, 한 낱 한 낱 숨은꽃들 숨결, 그러나 혹독한 군난 중이어 무사할 리 없습니다 곧 포졸들이 들이닥치고 붙잡히거나 아니면 가산을 적몰당한 채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제 잡힌 이들이야 청어 두름처럼 엮여 포졸들에게 끌려갑니다 서금순 이성칠 최분도 박춘삼 유씨 임서방 양서방 고선양 그에 아들들 그에 맏며느리 가운데며느리 막내며느리 항새바위 노파 떠꺼머리 총각 아아 다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스름 저녁나절 한잔모렝이 주막 마당 귀퉁이에 내팽개쳐진 채, 코만 훌쩍거릴 뿐 어디가 몹시 아픈지 들릴 듯 말 듯 낑낑거릴 뿐 뉜지는 또 식전에 먹은 콩나물국만 허옇게 토해 놓고설랑, 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 새와 같은 이들 풀과 같은 이들 이슬 같은 이들 비록 아무것도 아닌 이들, 하지만 천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아무 날 아무 때 아무 곳에서든 죽음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맞아 죽어도 괜찮고 정강이뼈가 밧줄에 썰려도 괜찮고 부모 자식 처자가 굶어 죽어도 괜찮습니다, 숨은꽃들의 삶은 이 찬류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시작 메모

봉고차를 타고도 / 구불구불 몇 시간째 들어간다 / 깊은 산골짝 다락골 성지 / 순교 성인 분 이 세상에 / 돈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 고작 / 가는 손목뼈 두 줄 남겼다 / 그게 오히 려 / 더욱 힘이 되는구나 / 피고름 묻은 눈 코 입 귀 / , 다리 놔두고 / 한갓 / 끄슬린 머리카락 한 줌만 남겼구나 / 그게 왠지 / 더욱 기쁨 샘솟는다 / 서슬퍼런 저 대원이 박 해시절 / 아예 / 불태워 없앤 천주쟁이 쟁퉁이 마을 / 이제 외인 할매만 몇 / 봄볕 길두럭 에 죽치고 앉아 / , 뜯어온 두릅 달래서껀 팔고 있다 - 졸시, ‘다락골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은화>는 박해 때 저런 우리 치명자들, 신앙을 지키던 무명의 숨은꽃들 얘기입니다. 아직 학교에 나갈 때였는데,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이 책을 권했습니다. <은화>라고, 선생님 한번 읽어 보시라고. 느닷없다 싶었는데,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니 내가 천주교 신자인 걸 알고, 또 언뜻 보기에 좀 열심한 이 같다 여겨 그랬나 봅니다. 아무튼 그때 그렇게 만난 책이 바로 <은화>입니다. 그 후로 가끔 여기저기서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무조건 첫자리에 놓습니다. 문장이 좋아서? 구성이 완벽해서? 주제가 심오해서?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입니다. 마치 시골 공소에 들러, 거기서 오랜 교우분께 띄엄띄엄 옛날 신앙 내력 듣는 듯, 그저 소박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때 그 책을 읽고 시로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진정으로 소박한 시 한 편 써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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