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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 시 한 편!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1.08.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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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시인, '시' 추천

출처: 예스 24

지루한 집콕, 가볍게 스낵 시 한 편 어떠세요?

  찌는 듯한 더위가 조금씩 물러가고, 우리는 이번 여름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강화된 거리 두기와 모임 자제, 그리고 대면 수업 연기까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여름이었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사람과 사랑.

  신동엽 문학상을 수상한 후 꾸준히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는 안희연 시인의 작품은 여름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2020년에 발표된 이 시집 중 인상 깊었던 '시'라는 작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재미있는 상징들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이번 스낵 시는 예술을 하는 독자라면 본인의 작품에, 일반 독자라면 내가 갈망하는 대상에 대입하여 읽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흰 접시는 흰 접시일뿐인데

깨질 것이 두려워 찬장 깊숙이 감추어놓고

 

흰 접시를 돋보이게 할 테이블보를 고르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제든 깨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말한다

듣고 있었을 텐데

 

그럴 때 이미 깨져버린 것

깨진 거나 다름없는 것

 

*

오래 전 내게 흰 접시가 있었어

어느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숫가에서 발견된 총 이야기를 하듯이

흰 접시에 관해 말할 때가 있다

 

흰 접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흰 접시를 그리워하느라 평생을 필요로 하는 삶

 

그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안희연, <시> 전문

 

  안희연 시인은 흰 접시를 곧 시로 인식한 채 시를 전개하고 있다. 시를 집필할 때 물체를 관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물체를 보다 보면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관찰하기 일쑤다. 사실 문학 작품은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이후로는 손을 떠나게 된다. 대중, 평론가, 비평가들에게 언급되고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시를 쓰는 행위 자체에 겁이 날 때 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내 시가 깨질까 봐, 상할까 봐 걱정하게 된다. 이러한 두려운 시인의 마음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었던 점은 안희연 시인이 이러한 전개를 상징하는 대상을 흰 접시로 설정했다는 부분이다. 접시는 무엇이든 올릴 수 있으며 밑바닥이다. 색이 없는 무색의 흰 접시는 어떤 색이든 물들 수 있다. 흰 도화지의 개념과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겠다. 시인은 접시 위에 완두콩, 딸기, 빵 등 다양한 재료를 올려둔다. 이는 시의 소재, 주제를 표현한다고 분석했다. 접시 위에 물체를 올린 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면 행위가 시를 쓰기 위해 작가가 자신만의 시점을 갖기 위해 하는 노력과 비슷해 보이지 않나.

  시가 후반부로 가면서 시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느껴졌다. 시인은 접시를 접시로 보지 못 하고, 안개 자욱한 곳에서 총자루를 봤을 때처럼 신비롭고 으스스한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접시, 시상이나 주제는 존재했는지도 헷갈리고,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 꽤 오랜 세월을 소비하는 삶. 하지만 작품을 위해 계속해서 애쓰고, 부질없을지라도 오래 고민하는 것이 곳 작가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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