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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 시 한 편! 파란 피의 여름, 강혜빈 시인의 '밤의 팔레트'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1.08.0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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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빈 시인 '커밍아웃'

출처: 예스 24

내가 너의 용기가 될게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 그리고 집콕. 출퇴근길에 휴대 전화 너머로 보는 유튜브 영상과 OTT 서비스 영상과 같은 스낵 컬쳐의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시각적 자극이 강하고 짧은 시간 안에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상물도 좋지만, 가끔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안아줄 스낵 시 한 편은 어떨까. 오늘은 떠오르는 젊은 시인, 강혜빈 작가의 <밤의 팔레트>를 살펴보자. 시인은 파란 피라는 이름의 포토그래퍼로써, 시인으로써 다양한 모습의 자아를 표출하고 있다. 피는 곧 빨갛다는 수식어를 깨고 본인의 파아란 색감으로 문단을 물들이고 있는 그녀의 작품 중, 시집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커밍아웃>이란 시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싶다.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낯설어지면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은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커밍아웃> 전문

 

 

  강혜빈 시인은 이전 밤의 팔레트를 읽은 후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인의 일상을 보며 더욱 관심이 가게 된 시인이다. 메일링 서비스를 적극 활용한 프롬 강혜빈’, 자체적으로 기획하는 독자와의 만남 등 젊은 시인다운 다양한 소통을 해오고 있다. 그녀의 시적 세계에서는 파란 피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피는 붉다. 그와 아예 반대되는 푸른 피는 일반이 아닌, 반대된 이반의 자아를 상징한다. 또 빨강과 파랑이 섞이면 다양함을 상징하는 보라가 되지 않는가. 이 시 역시, 자신을 날짜가 지난 토마토로 비유하며 어긋난 날짜 위를 버티고 있는 듯한 퀴어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토마토는 시인을 상징하는 파랑이 아닌 빨강, 하지만 점점 시들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또한 껍질이 있거나 딱딱한 과일이 아니기에 쉽게 무르고 짓이겨지기 쉬워 화자의 연약한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상징물이다. 싱싱한 토마토가 아닌 나, 이런 나에게 답을 주는 내용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아니기에 뉴스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 없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연 채로 소소한 반항을 해 보기도 하지만 영 혼자라는 단어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즉 시 속 화자는 혼자가 너무 익숙한,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강혜빈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축축한 비밀, 옷장 밖을 열고 나오기까지의 쉽지 않았을 과정들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강혜빈 시인은 시 속 세계관을 전체적인 시집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앞서 설명한 파란 피, 커밍아웃에 대한 상징들, 축축함 등 자주 쓰는 시어들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시집 속 작품들이 단편적이기보다는 하나의 긴 소설처럼 이어지는 듯한 분위기도 자아낸다. 문단에서 강혜빈 시인의 등장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리고 나서서 소통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젊은 작가의 싱그러움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색이 강하고 세계관도 뚜렷한 그녀의 다음 시집이 더욱 더 기대된다. 너의 용기가 되겠다고 말한 그녀의 다음 용기는 어떤 발자국일까. 그녀를 응원하고 싶다. 빨간 피와 파란 피, 우리 모두가 한데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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