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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에게 가고 나 그대에게 오고』 - 14

윤한로 시인
  • 입력 2021.07.25 16:12
  • 수정 2021.07.2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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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 시인

 

 

 

비웃지는 마시라

나는야

종이컵에 시를 쓰는

종이컵 시인

소공원 벤치 위에

구겨질 대로 구겨져

한 줄 또는

끽해야 두 줄

저 꾀죄죄, 일상생활

남몰래 찌그린다오

파리 모과 구두 말번지 촌충 따위

지각 조퇴 염소선생

발가락이닮았다 따위

혹 누군가 볼세 ㅠㅠ,

얼굴 불콰히 노래한다오

고달파라 내 영혼

그러구러 별처럼 구름처럼 흐르니

뉘렇게 짠 손 그득

 

언젠가 꼭 한 번은 맑게 읽히리

무신무신눔,

소리 들어가매 다시금 구겨질 대로 구겨젼

나는야 종이컵 시인

그러니 가자, 시시껄렁

더 작고 여리게

 

우리 정작

아픈 얘기들은 빼고

 

 

 


시작 메모

저 시는 10년 전 2011년에 쓴 시 <소공원>을 다시 들여다보고 쓴 시다.

*어데서 물큰

개비린내가 온다

노을에 탄 고동색 얼굴

쨀쭘한 눈

벤치에 구겨져

자꾸만 무신 새끼란다

종이컵 소주 커피

게우, 한 모금 손에 들곤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백석 시인이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백석 시인 시 가운데서는 좋아하는 시는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 어데서 물큰 개비린내가 온다고 하는 <>. <>를 단연 최고로 친다. <>는 딱 두 줄이다. 비 속에서 물큰 개비린내를 맡는 그 감성이, 숨결이 놀랍고도 기쁘고도 슬프다. 그래서 왠지 노숙자들을 위해 이 구절을 빌리고 싶었다. 그러구러 <소공원>이 나오고 다시 물큰, <종이컵 시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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