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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탐방기: 박여숙화랑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1.07.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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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2호터널 입구 옆 소월길 초입의 38길의 골목 끝에 자리한 3층의 카사 블랑카(casa blanca), 화랑의 2층에 도자기를 중심으로 한 공예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어 왠지 찻집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 남산의 박여숙화랑.

남산2호 터널 위 소월길38 골목의 끝에 자리잡은 박여숙화랑

2층에는 콘크리트와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돌의자(스툴)들이 널려있었다. 어느 틈에 올라와 안내를 하던 화랑 직원의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자유롭게 널려있는 데커레이션인 줄 알았을 텐데 여기서 두 달간 전시회를 개최한 이헌정 작가의 도자 조형물이라고 한다. 무심히 던져진 듯 놓여 있는 덩어리들이 작품이란 인위적인 제작에서 벗어나 각자의 생명력을 가지고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니 내가 접한 '만들지 않고 자연 발생적인' 그 첫 느낌이 맞았던 거다. 설명 없이 무심코 지나쳤다면 원초적 생명력을 담고 환경과 동화되었을 태초의 자연, 돌무더기 자체였다.

박여숙화랑 2층에 놓여 있는 돌무더기 스툴들
박여숙화랑 2층에 놓여 있는 돌무더기 스툴들

1983년 청담동에 문을 열고 그때만 해도 불모지나 다름없던 서울 강남에 현대미술계를 세운 선구자로 인정받으면서 2019년 지금 남산 자락으로 옮기기까지 근 40년 동안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작품 발굴에 힘쓴 박여숙 화랑을 국내 유일의 러시아 그림 전문 갤러리 갤러리 까르찌나의 김희은 관장의 페북에서 보고 방문하였다.

하얀 집, 카사블랑카 박여숙화랑

총 4층으로 이루어진 화랑의 1층에서는 <침묵의 소리>라는 단체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침묵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묶어 놓은 일종의 모음곡이다. 작품명과 작가의 이름표가 없는 게 특징이면 특징이랄까?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하나를 찾고 따라가며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1층에서 진행중인 침묵의 소리 단체전
1층에서 진행중인 침묵의 소리 단체전

한지의 원료이자 한국적 서정미를 불러일으키는 닥(楮)을 다루는 정창섭,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그 위에 숯을 올리고 또 한지를 붙이는 작업의 반복을 통해 탄생시키며 시각적 촉감(진짜 만지고 싶어 혼났다)의 이진우, 사발의 권대섭 그리고 이승희의 백자 도자화까지 공통점은 단색조 회화이다.

1층 문을 열자 맞이하는 단색의 조합, 가운데 놓여 있는 백자를 우리 집에 있는 같은 모양의 가습기인줄 알았다.
1층 문을 열자 맞이하는 단색의 조합, 가운데 놓여 있는 백자를 우리 집에 있는 같은 모양의 가습기인줄 알았다.

단색이라고 하면 오브제를 통한 각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색깔이 하나라고 여길 수 있으나 색은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 쉽게 비유해 우리의 서예가 단색조 회화 그 자체인게니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과정과 물성을 뛰어넘은 정신적 승화다. 그래서 그런지 침묵보단 고요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고 화랑의 BGM으로는 어설픈 뉴에이지가 아닌 가야금 산조의 진양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2악장이나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이었다면 무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거다. 

지하 1층과 지상 2,3층에는 환상이 스며든 현실, 이진용의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이진용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메인은 지하 1층이다. 리얼리즘이라하면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사실주의나 사진과 같이 극도의 현실과 구별이 힘들 정도의 정교한 하이퍼리얼리즘을 연상하였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이다.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가면 맞이하는 이진용의 환상적 리얼리즘

리얼한 묘사나 모방이 아닌 작가의 사진과 수첩을 합해 놓은 다이어리 같다. 작가의 서재 또는 작업실에 있는 책이나 열쇠 등의 작가와 함께 세월을 보낸 사물들의 교합이었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한 고서점 같았고 황학동 만물시장의 아무렇게나 포대로 쌓여 있는 책 더미 같았다. 누군가의 손에 닿고 닿으면서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간과 경험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수평으로 전시된 책들을 보면 20세기 최고의 RPG 게임으로 칭송받았지만 세기말에 9편으로 대장정을 마친 울티마 게임 속의 주인공의 지금까지 업적을 기록해놓은 태피스트리와 일치했다.

고전 RPG의 명작인 울티마 시리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든 행적들을 그려 놓은 세월의 테피스트리가 연상되는 이진용의 고서들

극사실화처럼 보이지만 어떤 형상을 그리고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이헌정 작가의 의자처럼 메이킹 하지 않고 작업의 세월로 쌓여진 덩어리들이다. 알지 못하지만 추측할 수 있다. 이진용 작가의 작업실에 가면 수년간 그가 수집해온 골동품과 목판활자와 열쇠, 화석, 책 등이 쌓여져 있을 거라고.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실 모습 그대로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니 환상과 리얼리즘의 결합이 맞다.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그림'이라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사전적 의미를 비껴간 작가의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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