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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에게 가고 나 그대에게 오고』 - 8

윤한로 시인
  • 입력 2021.06.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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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스토리(real story)

 

아파트 주차장 여중생 성추행범이 잡혔다

범인은 땅딸막한 사십 대 일용 노동자로

처자식도 다 거느린 사내였다

해거름쯤 평소와 같이 연장 가방을 챙겨들고

그 일 벌써 새까맣게 잊었겠구나

뒷주머니에 스포츠 신문 한 장 쿡 찔러 넣고

웬일로 좀 일찍 들어온다 싶더니, 오든마튼, 붙잡혔다

번짐 처리 얼굴에서

꼭 애 것도 같고 고양이 것도 같고

어찌 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변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어,당신들도대체뭐야 하며

둬 번 딱 잡아떼다간, 개길 듯

갑자기 꼬리를 내린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죄송하다며, 자기가 죽을죄를 졌다며

싱겁게 실갱이는 끝나고 만다

이윽고 경비실 화단 앞에서 끌려가는 사내

여전히 물크러진 번짐 처리 얼굴

약간 휜 걸음에 등산화를 신었고

바짓단만큼은 양말 속, 정갈스레 질러 넣었다

이제 별을 달 그자

포승줄 매듭 사이로

파리 한 마리 자꾸만 붙었다 떨어졌다 하더니

어디선가 한 마리 더 데불고 온다

리얼스토리가 끝난다

 

 


시작 메모

오후 두세 시, 옥탑방 빨랫줄 너머 여름 구름은 고요하다. 한 개의 다리는 다른 두 개의 다리를 꿈꾸고, 또 한 개의 다리는 또 다른 두 개의 다리를 꿈꾸고, 다시 또 한 개의 다리는 다시 또 다른 두 개의 다리를 꿈꾸고, 이윽고 서로가 서로를 열렬히 꿈꾸는 세 개의 딱딱한 다리. 그때 그대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런데 파리는 행복할까. 종편 티브이 리얼스토리 프로그램 속 무수한 범인들의 변조된 음성, 번짐 처리 초상은 왜 그렇게 슬프고 아픈가. 초현실적 상황이, 아니 비현실적 상황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다. 그대 평범하지 않은가 말이다. 슬플 것, 아플 것 하나 없이 말이다. 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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