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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탐방기: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The Untitled Void)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1.06.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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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경희궁3길 3-5의 복합문화공간

음악가다 보니 세종문화회관에 자주 가고 간 김에 경희궁을 한 바퀴 도니 나름 그 동네에 대해 잘 안다고 여겼음에도 이런 보석 같은 공간이 있는지 몰랐다. 서울 시내 한복판의 일반 상가건물 중 한 층에 위치한 갤러리 인줄 알고 갔다 경희궁3길에 도착, 밑에서 언덕 위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니 풍기는 포스부터 범상치 않았다. 갤러리 이름 그대로 뭔가 허공 속에 떠 있는 공간이었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와 다양한 장르와 형태를 합한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만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매체를 담을 수 있을 거 같은 이 건물을 지었거나 소유자는 건축을 전공하거나 기반을 둔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왔다. 1층과 4층으로 분리해서 2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종로구 경희궁3길 3-5에 위치한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

① 민연식: The Meditation 6월 27일까지

사진만을 일률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 공간과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과감하게 활용했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 조명까지 사진에 걸맞게 어둡고 간헐적으로 쏘는 컴퓨터 웨이브 사운드는 속세를 떠난 가상의 3세계, 입체적인 공간에 붕붕 떠 있는 몽환적인 느낌을 불러왔다. 일종의 암실 같았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먹물로 찍은 사진'이었다. 색은 그래서 흑백 두 개면 충분했다. 먹의 농담을 통하여 흑암은 마치 담배연기처럼 자연스레 피어오르며 내면의 성장과 함께 명상에 빠져들어 회개하며 선적인 수행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 1층의 사진작가 민연식의 개인전: Meditation

고고한 정신 수련의 상징인 선비의 난이 그려지고 화폭 위의 산수화가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사물은 고매한 선비의 친구 일거니 산이 펼쳐지는건 자연스럽다. 어디서 본듯한, 한 번은 오른 듯한 산들의 모습이 역시나 흑백으로만 나타내지면서 온갖 속세의 번잡함과 더러움은 의도적으로 가려지고 있다.

민연식의 사진들

전시회 타이틀이 명상이다 보니 자연스레 쥘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이 떠올랐다. 음악만 들으면 너무나 성스럽고 정결하기 그지없어 성녀라고 여길 수 있으나 타이스는 희대의 요부이자 창녀다. 그녀의 노래는 헛된 쾌락과 향락을 버리고 종교의 품에서 평화를 누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환골탈태의 과정이며 민연식의 사진들 역시 어느 한 경지의 도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탐미하고 카메라를 통해 재현된 작업을 총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라는 공간을 십분 활용했다.

② Early Summer Narratives: 만욱, 수연, 유재연, 정이지 6월 27일까지

그런 숭고함을 품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4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1층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눈이 동그라졌다. 1층의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전시를 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현 6월의 1층과 4층은 양극단이다. 1층이 수도원이라면 4층은 그나마 비가 내려 우중충해서 덜 그렇지 마치 스페인의 마요르카에 온듯했다. 4층은 카페다. 카페에 4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다. 4개가 하나요 하나가 4개였다. 색을 최소화 한 2층에 비해 4층의 형형색색은 마치 판타지 월드나 놀이동산에 온듯하다.

만욱 작가의 '가짜 정글의 가짜 같은 진짜 고릴라'

내려서 꺾자마자 관람객을 반기는 만욱 작가의 <가짜 정글의 가짜 같은 진짜 고릴라>와 여자 화장실 문 앞에 걸려진 <가짜 나무 아래의 진짜 고릴라>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색의 극대치로 감정을 지닌 동물의 자화상을 그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흐르는 정서적 공감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왠지 불쌍하고 짠하다. 당장에 액자에서 꺼내주고 싶다.

유재연 작가의 'Moonlight punch'

유일하게 땅바닥에 설치된 유재연의 <Moonlight punch>를 지나 수연의 그림들은 깔끔하고 감각적이다. 고릴라와 펀치를 보고 지나서 그런지 단순한 게 눈을 사로잡는다. 

수연 작가의 '부드러운 미래'

정이지 작가가 머리카락을 그린 그림에서 갈라진 머릿결 사이로 내민 귀를, 어깨를 보고 주목해 그린 그림에서 구겨진 옷자락의 겨드랑이에 먼저 시선이 꽂혔다. 그린 사람과 보는 사람의 찰나의 시선이 너무나 다름에 제목을 보고 놀란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자 이면 일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순간을 같이 경험했을까.... 보지 않고 그려서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의 기억들은 분명히 지워지거나 왜곡될 건데 순간의 기록으로 과거를 투영하고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넓히려는 시도이다. 그림 한 폭이 한 명의 소유가 아닌 만인의 기억을 소환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정이지 작가의 '머리카락'와 '어깨'
정이지 작가의 '머리카락'과 '어깨'

오늘은 전시를 보러 갔기 때문에 비를 벗 삼아 커피 한잔 즐기지 못하고 나왔지만 이제 알았으니 세종문화회관의 음악회 전에 경희궁 한 바퀴와 인왕산 산보 대신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의 루프탑 야외 카페에서 명상과 힐링의 시간을 가지면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무제'라는 갤러리 이름은 참으로 탁월한 작명이다. 누구에게나 그 공간을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고 쓰일 수 있으니 말이다.

The untitled Void 1층에서 열리는 민연식 작가의 Meditation의 전경
The untitled Void 1층에서 열리는 민연식 작가의 Meditation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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