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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사랑을 외치다

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1.05.3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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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추억

미국에서 민박을 했다. 계약서를 쓰는 첫날, 사무실에 남자애가 무릎에 손을 모으고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첫인상에 피부가 참 깨끗하지 못하단 생각을 했다. 여드름 자국이 그대로인, 얼굴에 전혀 투자하지 않는 남자애다. 내 속도 모르고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다. 그렇게 웃지 마라, 넌 웃어 봤자 이미 매력은 없다. 내 입주 동기다. 한 날은 밥 사 준다 길래 한류 메뉴인 비빔밥 랩을 먹었다. 주문할 때 녀석에게 피클을 빼 달라 했는데 들어있다. “너 이거 빼라 했잖아” “말했어요”그러면서 자기 방금 화장실에서 손 씻었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랩을 풀어 피클을 하나하나 골라준다. 너무 맵다 했더니 고추장도 냅킨으로 닦아낸다. 전자랜드를 구경하자며 빙빙 돌다가도 자기 때문에 왔다면서 음료수도 사준다. 쬐그만 게 제법 경우도 바르다. 목마를까봐 배려심도 싶다. 내가 시키는 일은 총 맞는 거 빼고 다 한다. 착한 놈이다.

기특해서 밥을 해주면서, 마님은 왜 돌쇠에게 쌀밥을 주시는가 손가락질 하면서 놀리면, 에이, 왜 이러세요 웃고 만다. 장난으로 만날 누나가 너~~무 예~~뻐~~서, 내 뺨을 감싸면,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아침에 항상 베이글을 먹길래 넌 얼굴은 토종인데 먹는 건 뉴욕커다 놀려대면, 에이, 베이글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먹어보라고 준다. 말끝마다 이런 건 집사가 다 해줘서~~~, 했더니 진지하게, “누나, 누나 집에 정말 집사 있어요? ” “그걸 믿냐 믿어?” “흥! 그 놈의 집사는 어딨는지” 자식이 생긴 대로 순진하다.

엄청 싸게 산 명품 옷을 자랑했더니 자기 이모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라고 한다. 기분 잡쳤다. 숙소 남자들이 나이를 물어 말하니 동안이라 감탄한다. 탄력 받아 외국 사람들은 19까지 봐요 자랑했더니, “누나, 누나 나이대로 보여요” 눈치라곤 코치한테 팔아먹었는지 내일부터 쌀밥은 없다. 어학연수를 온 그 애는 새 집을 구해 나간 후에도 누나 보러 왔다고 우리 숙소에 자주 놀러 왔다. “새 집 좋으냐?” “다른 룸메이트들은 3일 있다 와요. 그 동안 와 있어도 되요” 내가 신세대냐, 너 하나 있는 집에 가서 잠이 오냐? 김치찌개 잘한다고 밥 먹으로 오라는 것도 안 가는 난데. 속으로 면박을 주었다. 룸메이트 여자애는 그 애를 보더니, 꼭 착해야만 해 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팔에 타투를 새겨야 한다고 장단 맞췄다. 여자애는 한 성질 하는 나에겐 차카게 살자 라는 타투를 새기라고 놀렸다. 우리는 꼭 착해야만 할 커플이다.

길을 걸으며 선글라스가 멋있다고 했더니 지 큰 얼굴에 맞는 거 고르느라 고생했다 한다. 고초가 심했을 듯하다. 옷도 얼굴하고 어울리지 않게 적절히 들러붙은 7부 바지에 깔끔하게 멋 부리는 것도, 로션 하나 사 준다 하니 향마다 맡아보고 지 취향이 있는 것도 귀여웠다. 내가 다른 도시로 떠나기 전 날, 함께 쇼핑을 했고, 철없는 녀석은 자기 팬티를 골라 달라 한다. 생전 그렇게 다양한 남자 팬티를 본 건 처음이다. 일일이 들고 자상 하시게도 설명까지 해주신다. 남자 팬티는 앞면이 더 짧아야 걷기 편하다는 소중한 정보도 얻었다. 니 눈에는 정녕 내가 여자로 안 보이는 게냐. 그 애가 먹고 싶다는 자장면을 같이 먹고 우산 하나로 비를 막으며 나란히 걸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커피를 마시자 한다.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잤다는 그 녀석은 누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눈독 들였던 자동차를 빌려야만 갈 수 있는 명품 아울렛을 내일 가자한다. 이미 기차표를 사 놓은 나는 아쉬웠지만 거절했다. 짝사랑은 들키면 끝난다는 그 애의 말에 그 놈을 보며 참 많이도 들켰겠구나 생각했다. 지금도 짝사랑을 하고 있냐는 내 물음에 대답이 없다. 나냐?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든 아니든 무슨 소용인가. 짝사랑도 나름이지 상대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담배를 많이 피는 그 아이를 위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양제와 요리를 잘하는 그 애를 위해 미술관에서 산 귀여운 양파, 배추 모양의 소금, 후추 통 세트를 선물했다. 장가갈 때 혼수로 해가라고 했다. 내 맘도 가져가 주렴. 그 놈을 보면서 인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면은 외면을 덮는다.

나는 사랑을 한 거 같은데 불행은 그 사랑을 나 혼자만 만났다는 거다. 상대방은 성격 더러운 독신 아줌마를 만난 거다. 그래도 그 애가 내 생각이 났다며 옮겨간 숙소 여자애가 입다 버린 명품 점퍼를 준 것과, 카페에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눈빛과, 자기 우산이 있었음에도 내 작은 우산 속으로 들어왔던 마지막 날의 추억이 따스하다. “누나, 연락 계속 해 주세요, 소식 듣고 싶어요.” 다른 도시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받은 전화기 너머로 그 애는 이별을 그렇게 말했다. 내 짝사랑은 들키지도 않았는데 끝이 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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