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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새들에게 묻는다 ]

김주선 수필가
  • 입력 2021.02.20 15:03
  • 수정 2023.09.1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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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 "폴라리스를 찾아서" 수록 작

다시 태어난다면 새가 되고 싶었다. 미술 시간에 아버지를 그린 그림에도 날개가 있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면 안마당에 지게를 내려놓던 아버지의 그을린 어깨가 서강(西江)에 사는 가마우지처럼 보였다. 고단했던 하루를 씻어내느라 냇가에서 멱을 감던 아버지는 물속 깊이 자맥질을 끝내고서야 물기를 털고 말렸다. 지게 자국이 선명한 어깻죽지 굳은살은 오래전에 굳어버린 날개 자국은 아니었을까.

새들에게 묻는다 / 김주선

 

  논둑에 세워진 허수아비가 어깨춤을 추었다. 광대 분장의 얼굴은 새들도 겁내지 않을 표정이었다. 바람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동안 구경하던 참새 가족이 날아와 허수아비 어깨 위에 앉았다. 핫바지 광대 따위는 겁나지 않은 모양이다. 고향 가는 길, 들녘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농부와 새들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새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지껄이는 걸까. 어린 날, ‘~, ~새를 쫓던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동구 밖까지 들리는 듯하다.

학교 다닐 때 우둔하거나 산수가 더딘 학생을 가리켜 새대가리라고 꾸짖던 담임이 있었다. ‘오늘 아침 너희 어머니가 까마귀 고기를 주셨냐며 머리를 콩콩 쥐어박던 선생님이었다. 고향의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보니 새의 부리처럼 쪼아대던 담임의 아픈 말이 떠올랐다. 정작 본인은 뻐드렁니에 동그란 뿔테안경을 낀 올빼미 상이었다.

봄이 오면 유난히 새가 울었다. 나는 곤줄박이를 좋아했다. 여느 새보다 알록달록한 주황색 무늬가 귀엽고 깜찍해 새장에 두고 싶었다. 짝짓기를 마친 한 쌍이 대추나무에 앉아 어찌나 사랑스럽게 속삭이는지 참 보기 좋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새가 되고 싶었다. 미술 시간에 아버지를 그린 그림에도 날개가 있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면 안마당에 지게를 내려놓던 아버지의 그을린 어깨가 서강(西江)에 사는 가마우지처럼 보였다. 고단했던 하루를 씻어내느라 냇가에서 멱을 감던 아버지는 물속 깊이 자맥질을 끝내고서야 물기를 털고 말렸다. 지게 자국이 선명한 어깻죽지 굳은살은 오래전에 굳어버린 날개 자국은 아니었을까. 그리 상상할 정도였다.

한때 새를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들인 과학전집이나 상식 백과들은 엄마인 나에게 유익한 잡학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무속에 숨어있는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도구(나뭇가지)를 사용하는 까마귀는 침팬지보다 똑똑하다. 포유류의 똥으로 곤충을 유인하는 올빼미, 숫자를 세는 비둘기, 그중에 단연코 앵무새의 지능은 최고였다. 단어의 의미는 물론이고 색깔을 맞추고 산수까지 한다고 하니 새대가리라고 놀리는 말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세대 영농교육을 받은 장조카가 과수 농사를 시작할 무렵, 새가 되겠다던 나의 꿈에 비상등이 켜졌다. 이장이 새 쫓는 장비를 가져와 마을 회관에서 선보인 날이었다. 과수원을 하는 농부에게 천적은 멧돼지보다 새였다. 진화하는 새들이 더는 허수아비를 겁내지 않자 카바이드 폭음기를 설치했다.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탄화칼슘(CaC2) 통에 떨어져 가스가 발생하면 폭발하는 폭음기였다. 물의 양에 따라 폭발하는 시간과 소리조절이 가능했다. 소리가 클 땐 대포를 쏘는 것 같아 주민의 원성을 샀다. 대부분 폭죽 터지는 소리거나 공포탄 소리와 비슷했다. 새를 쫓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몰라도 공포탄 소리는 사람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정적을 깨우는 총소리와 함께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새 떼의 날갯짓이 요란스러웠다.

고향엔 두 종류의 새가 있었다. 해충을 잡아먹는 이로운 새와 곡식이나 과일을 쪼아놓는 해로운 새였다. 생산성을 높이고자 제초제와 농약을 살포하자 해충은 확연히 줄었다. 먹이가 줄자 이로운 새들이 떠났다. 그 빈자리에 직박구리가 찾아와 터를 잡기 시작했다. 과수원에 피해를 많이 주는 직박구리는 유해조류라 별 반갑지 않은 텃새였다. 겁도 없고 호기심도 많아 아무리 첨단 장비를 설치해도 단맛이 절정인 사과를 죄다 쪼아놓는 새였다.

초음파기, 음향 조류 퇴치기, 방조망, 포획 트랩 등, 새 쫓는 다양한 설비들이 앞다퉈 개발되어도 학습효과가 뛰어난 새들은 언제나 과수원에 와 놀았다. 자그마한 녀석이 어찌나 시끄럽게 울고 난폭한지 저보다 몸집이 큰 까치를 공격할 만큼 천적이 없었다.

해충도 잘 잡아먹고 과수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까마귀는 겁이 많았지만, 늙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만큼 효심이 지극한 새였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면 재수 없다고 엄마는 식구들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까치나 제비는 인간의 길조와 경사를 알리는 새로 여겼다. 특히 아침 까치는 대()길조의 새여서 까치 소리에 엄마의 신발 끄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그러나 까치만큼 인간에게 해로운 새도 없었다. 직박구리 못지않게 농가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제비는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며 심지어 부엌 찬장까지 똥을 싸대는 바람에 제비집을 뜯어낼 수도 없고 쫓아낼 수도 없어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

인간의 변화만큼 새들의 삶도 변화가 왔다. 도시의 비둘기는 사람을 겁내지 않으며 갈매기는 유람선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이 던지는 새우과자에 집착한다. 풍요로웠던 산과 들과 바다에 먹잇감이 줄자 전 세계적으로 해안가 도시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새들 때문에 이미 골칫거리가 되었다.

젊은 날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여러 번 읽었다. 새를 좋아한 이유였다. 먹잇감을 찾는 일보다 더 높을 곳을 날고자 멋진 비행을 연습했던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과 이상을 응원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뱃고동 소리와 끼룩거리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항구의 낭만이었지만, 해안가 횟집 하수구에 버려진 썩은 생선 내장을 물어뜯던 갈매기는 큰 충격이었다.

새는 가벼워 보지이지만 무리가 되어 모이면 거대한 힘이 생겨 인간을 역습할 것이다. 철새 도래지에서 수많은 탐조원이 본 철새의 군무는 장관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은 새 떼는 가끔 섬뜩할 때도 있다. 어느 조류학자는 새들의 군무는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에어쇼가 아니라고 했다. 먹이활동을 하기 전, 전열을 다듬는 질서이며 생존을 위한 치열한 비행이었다. 만약 먹이터가 사라진다면 언제 도시의 하늘을 덮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 날부턴가, 산림이 훼손되고 하천은 오염되었으며 농가는 첨단 장비로 새들을 위협했다. 일부 환경운동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생태계의 변화는 지금, 인류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걸까.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 정말 코로나는 박쥐 때문일까?. 새가 바이러스의 숙주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조류 인플루엔자를 비롯해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는 요즘,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오염을 일삼는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는 아닌지 고향 들녘의 새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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