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오래된 기억 5-5 / 사람 살려

김홍성
  • 입력 2021.01.22 20: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1년은 몇 년 전인가? 37년 전이다. 적음 형이 33세가 된 그 해에 나는 28세였다. 나는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대문구 교남동의 잡지사였다. 적음 형은 술값이 떨어지면 여기저기 전화를 했는데, 그중 한 군데가 내 직장이었다. ‘형이다로 시작해서 돈 좀 있나?’로 이어지는 형의 전화는 사실 반갑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감 때는 짜증도 났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 하세요이러면 나중에 언제?’하고 물었다. ‘, 전화 끊는다. 미안.’이러기도 했다. 셋방을 얻어 결혼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는 첫 직장에서 잘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따라다녔다. 적음 형도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싶었고 정 다급하면 다른 전화번호를 찾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적음 형에게는 스폰서가 많았고 점점 줄기는 했지만 끝없이 이어졌다. 주지라도 하는 도반들이 있었고, 문창과 후배들이 있었고, 인사동 후배들이 있었다. 적음 형을 도와 줄 후배들은 청파동에도 있었고 안암동에도 있었다. 그들 중 한 후배는 말년의 적음 형이 살았던 지역의 면사무소에 가서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생활보조금을 타게 해 주었다.

 

1981년 당시에도 흑석동에 가 보면 적음 형의 스폰서 노릇을 안 한 후배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물론 한 때였고 고작해야 술값이나 택시비 정도였지만 적음 형이 전화로 돈 좀 보내라하면서 불러준 은행 계좌로 송금했다는 후배들도 있었다. 아직 인정이 메마르지 않은 시대였고 이른바 낭만이 남아 있는 시대였다.

 

적음 형은 늘 낄낄거리고 술 앞에서 헤벌쭉 웃고 거리에 나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적음 형은 절에서도 사회에서도 조금씩 소외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음 형이 없는 흑석동 술자리에서는 적음 형을 이야기 했다. 인사동 술자리에서도 적음 형을 이야기 했다.

 

적음 형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면 적음 형을 이야기 했다. 그러다 보면 적음 형이 금방 주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환영이 보이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정말 적음 형이 나타났다. 누군가 그 때 사람 살려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했고 적음 형도 사람 살려를 따라하며 호탕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날 이후 적음 형은 곳곳에서 사람 살려로 주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그랬던 적음 형이 안 보인다 싶은 지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편집실 문 밖에 누가 나를 찾아 왔다는 전갈을 받고 나가보니 모르는 사내가 멋쩍게 서 있었다.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처럼 삭발한 머리 한 군데에 혹이 있었고 피 멍이 든 자리도 있었다. 사내의 입에서 적음 형의 본명이 나왔다. 아느냐고 해서 안다고 했더니 주머니에서 뭘 꺼내어 내밀었다. 쓰고 버린 휴지처럼 꾸깃꾸깃한 종이였다. 펼쳐 보니 적음 형의 메모였다. 예의 그 필체는 맞는데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급히 쓴 것이었다. ‘이 사람에게서 내막을 잘 들어 보고 빨리 와라라는 내용이었다.

 

사내는 응암동의 마리아 갱생원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은 친척에 의해서 간신히 나왔지만 적음 형은 누가 찾아 가지 않는 한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난감했다. 몇 가지 더 물어 보고 고맙다고 했는데 그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돌아서서 쭈뼛쭈뼛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어 했다. 무슨 하실 말씀 더 있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적음 형이 해 준 말을 전했다. 나에게 가면 대포 값 정도는 줄 거라고 했다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사내는 응암동에서 바로 나를 찾아 온 게 아니었다. 언제 나왔는지 몰라도 나오자마자 주점에 들어가 술 마시고 술값을 못 내서 머리에 혹이 나고 멍이 드는 폭행을 당했을 것이다. 응암동에서 머리에 폭행당한 흔적이 역력한 원생을 그냥 내 보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콧물이 나서 코풀려고 하다가 주머니 속에서 적음 형이 급히 휘갈겨 준 메모 종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나에게 가면 대포 값 정도는 줄 거라는 말도 즉시 떠올랐을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