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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9 / 노래하는 보살

김홍성
  • 입력 2021.01.2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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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음 형이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 인근의 오래 된 단층집 구석방에 살았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내가 도망치듯 네팔로 떠나곤 했던 1991년 이후부터 아주 살러 갔던 1996년 이전일 수도 있다.

 

내 직장이 세종로에 있었던 1985년 무렵일 수도 있다. 잡지 쟁이는 보따리 장사라는 말도 있었는데, 나는 직장을 여러 번 바꿨다. 한 번 바꿀 때마다 직급이 오르거나 보수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여러 번 바꿨듯이 적음 형의 거처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이 산에서 내려오고, 다시 저 산으로 들어갔다가 내려오기를 거듭하던 적음 형이 용케도 삼청동에 방을 얻어 살았던 그 때 나는 적음 형을 따라서 그 집에 갔었다.

 

심야였다. 둘 다 무척 취했던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마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청진동 해장국집이거나 인사동의 부산식당이거나 피맛골 입구의 열차집이거나 주점 시인통신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직장이 세종로였든 삼선교였든 시인통신에 자주 갔다. 거기 가면 언제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거나 들어서는 모습, 희한한 취중 작태와 박장대소하는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적음 형과 나는 아마도 시인통신에서 쫓겨나 삼청동으로 갔을 것이다.

 

삼청동 그 집은 보살 모녀가 사는 집이었다. 적음 형은 구석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답지 않게 제법 거드름을 피웠다. 거실로 쑥 들어가더니 안방에서 얼굴을 내민 할머니 보살에게는 그만 주무세요했고, 건넌방에서 얼굴을 내민 젊은 보살에게는 나오너라했다.

 

젊은 보살은 싫은 기색 없이 나와서 우리에게 방석을 나눠 주고 금방 간소한 술상을 차렸다. ! 별 일 다 있네 싶었다. 셋이 같이 마셨다. 몇 순배 돈 후에 적음 형이 보살에게 말했다. “노래 한 번 불러 봐라.” 주인집 젊은 보살에게 적음 형이 그렇게 쉽게 노래를 청한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적음 형은 나에게도 말했다. “들어 봐라. 잘 한다. 왕년에 가수였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보살이 말했다. “반주도 없이 무슨 노래를 하나.” 하고 안 할 태세더니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기면서 딱 딱 딱 리듬을 만들면서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 ? ? 정말 하네. 정말 해.

 

기습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뜻하지 않게 노래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정말 잘 하는 노래였다. 여태 들어 본 중에 가장 깊은 감동이 있는 노래였다. 너무 놀라서 술이 확 깼다. 음정도 박자도 완벽했다. 슬프면서 기쁘고, 기쁘면서 슬픈 노래였다.

 

그게 무슨 노래였냐고 묻지는 마라. 안타깝다. 노래 제목도 가사도 곡조도 음반을 낸 가수의 이름도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평생 못 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노래를 어느새 다 잊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기억의 어느 한 구석이 캄캄한 망각 속으로 함몰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또 두렵다. 그 자리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내 감동이 왜곡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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