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음 형이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 인근의 오래 된 단층집 구석방에 살았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내가 도망치듯 네팔로 떠나곤 했던 1991년 이후부터 아주 살러 갔던 1996년 이전일 수도 있다.
내 직장이 세종로에 있었던 1985년 무렵일 수도 있다. 잡지 쟁이는 보따리 장사라는 말도 있었는데, 나는 직장을 여러 번 바꿨다. 한 번 바꿀 때마다 직급이 오르거나 보수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여러 번 바꿨듯이 적음 형의 거처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이 산에서 내려오고, 다시 저 산으로 들어갔다가 내려오기를 거듭하던 적음 형이 용케도 삼청동에 방을 얻어 살았던 그 때 나는 적음 형을 따라서 그 집에 갔었다.
심야였다. 둘 다 무척 취했던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마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청진동 해장국집이거나 인사동의 부산식당이거나 피맛골 입구의 열차집이거나 주점 시인통신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직장이 세종로였든 삼선교였든 시인통신에 자주 갔다. 거기 가면 언제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거나 들어서는 모습, 희한한 취중 작태와 박장대소하는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적음 형과 나는 아마도 시인통신에서 쫓겨나 삼청동으로 갔을 것이다.
삼청동 그 집은 보살 모녀가 사는 집이었다. 적음 형은 구석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답지 않게 제법 거드름을 피웠다. 거실로 쑥 들어가더니 안방에서 얼굴을 내민 할머니 보살에게는 ‘그만 주무세요’ 했고, 건넌방에서 얼굴을 내민 젊은 보살에게는 ‘나오너라’ 했다.
젊은 보살은 싫은 기색 없이 나와서 우리에게 방석을 나눠 주고 금방 간소한 술상을 차렸다. 헛! 별 일 다 있네 싶었다. 셋이 같이 마셨다. 몇 순배 돈 후에 적음 형이 보살에게 말했다. “노래 한 번 불러 봐라.” 주인집 젊은 보살에게 적음 형이 그렇게 쉽게 노래를 청한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적음 형은 나에게도 말했다. “들어 봐라. 잘 한다. 왕년에 가수였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보살이 말했다. “반주도 없이 무슨 노래를 하나.” 하고 안 할 태세더니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기면서 딱 딱 딱 리듬을 만들면서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어? 어? 어? 정말 하네. 정말 해.
기습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뜻하지 않게 노래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정말 잘 하는 노래였다. 여태 들어 본 중에 가장 깊은 감동이 있는 노래였다. 너무 놀라서 술이 확 깼다. 음정도 박자도 완벽했다. 슬프면서 기쁘고, 기쁘면서 슬픈 노래였다.
그게 무슨 노래였냐고 묻지는 마라. 안타깝다. 노래 제목도 가사도 곡조도 음반을 낸 가수의 이름도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평생 못 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노래를 어느새 다 잊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기억의 어느 한 구석이 캄캄한 망각 속으로 함몰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또 두렵다. 그 자리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내 감동이 왜곡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