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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2 / 集中

김홍성
  • 입력 2021.01.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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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음 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1949년생이다. 처음 만났던 1975년에 우리는 둘 다 20대였다. 스물 두 살의 내가 스물일곱 살의 적음 형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선시를 읽는 듯 신비스러웠다. 적음 형의 시는 한문을 번역한 선시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운율이 느껴졌다.

 

글씨체는 짧고 꼬불거리는 터럭을 모아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듯, 여차하면 바람에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 적음 형의 서체를 누구는 음모정렬체라고도 평했다. 악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웃자고 한 평인데 딱 들어맞았다.

 

적음 형은 내 공책에 써 준 자기 시를 낭송해 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나는 멋쩍기는 했지만 소리 내어 읽었다. 적음 형은 흡족치 않은 듯 허공을 바라보더니 직접 그 시를 암송했다. 승려라서 염불 공덕을 많이 지은 탓인지 시 낭송 하는 적음 형의 음성은 평소와 달랐다. 굵고 부드럽고 구성졌다. 경상도 억양이 적절히 섞여 있어서 더 잘 어울렸다. 나는 적음 형이 염불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지만 음반을 내도 인기를 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적음 형은 한 때 보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산에서 내려오는 첫날에 입은 승복을 보면 어느 큰 스님보다 잘 차려 입었다. 먹물 들인 세모시 바지저고리에 풀을 먹여서 날아갈 듯 차려 입은 입성은 보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반반하게 삭발한 머리를 덮은 모직 빵떡모자는 국산 같지 않았다. 목이 긴 단화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그런 날에는 노잣돈도 두둑하게 있었는데 그 돈을 같이 쓴 일은 드물다.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서 그 날로 다 날렸다. 다음날 보면 빵떡모자도 없어지고 구두도 없어져서 민 대머리 그대로 변소에나 놓여 있었을 꾀죄죄한 슬리퍼를 꿰고 있기도 했다. 물론 풀 먹인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친해진 후에는 적음 형의 돈을 내가 보관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반강제로 빼앗은 적이 있다. 나는 형을 만날 때마다 그 돈을 조금씩 갚았다. 술 마시러 가면서 갚고, 술값을 형이 내는 식이었다. 택시를 잡을 때 갚아서 형이 택시비를 내게 하는 식이었다. 형은 감춰둔 돈이 있어도 꼭 내가 맡아 둔 돈에서 찾아서 쓰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맡겨둔 돈의 배 이상을 나에게 맡겨둔 것으로 착각하곤 했다. 나는 형의 돈을 맡아 둔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적음 형은 한 때 잘 알려진 절의 주지 노릇도 했다. 그 때 배웠는지도 모르지만 도통한 체하는 늙은이들의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다. 한참 미쳐서 돌아칠 때는 풀을 잘 먹인 베옷을 떨쳐입고 나타나 술집을 전전하다가 한 후배의 집에 가서 큰 결례를 했다.

 

술상을 차려 주고 나가는 후배 부인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이 년 어디 가냐? 여기 앉아라. 이년아.” 했으니 후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적음 형은 그 집이 후배의 집이 아니고 요정 같은 덴 줄 알았다던가? 그 일로 인해서 훗날 뜨거운 맛을 보기도 했다. 정월 초하루에 찾아간 그 후배의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걸레 빨던 구정물이 날아왔으니 말이다.

 

적음 형도 다른 스님들처럼 그냥 산문에 머물며 여가에 시나 수필을 쓰면서 스승 시봉을 잘 했더라면 진즉에 주지도 되고 큰스님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음 형은 절을 견디지 못하고, 절은 적음을 견디지 못했다. 점점 더 갈급해 마지않게 된 술과 정 때문이었다.

 

적음 형은 늘 쫓겨나고 두들겨 맞고 혈변을 보다가 도반이 있는 절에 찾아갔다. 도반이 묵는 뒷방에 누워 골골 앓다가 회복기에 접어들면 불현듯 휘날리는 음모정렬체를 붙들어 시를 썼다. 적음 형은 그 시를 후배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 왔지 싶다. 集中은 그 중 한 편이다.

 

폭우와 뇌우 뒤

우는 개구리들 개굴개굴

휘너른 들판 가득

채우고 채워

홀로 정수리에 무엔가

아득한 빛을 띠고 섰는

장승같은 사내를 향해

일제히 개굴개굴

아아 저 끄트머리에선

이상스레 안개만 피어오른다

뿌우연 안개만 피어올라서

어디엔가로 조금씩 조금씩

운행하면서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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