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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1 / 버려진 鬼面

김홍성
  • 입력 2021.01.19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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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인이 낸 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에 수록된 단편소설 속에서 적음 형을 만났다. 여러 해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적음 형은 미아리 시절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녔던 선배이다. 박인은 적음 형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사람임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내 기억에는 적음 형을 그렇게 진실하게 대했던 후배는 많지 않다. 함부로 대하고 반말했던 후배, 약소하나마 지출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미리 내빼는 후배, 심지어 발길질을 했던 후배도 있었다. 술집에 잡혀 놓고(앉혀 놓고) 도망치는 데 필요한 볼모로 써 먹은 후배도 있었다. 그러나 적음 형은 그런 후배들을 술 앞에서 다시 만나면 너털웃음으로 대했다. 발길질을 한 것도, 술집에 잡혀 먹은 것도 다 장난으로 여긴다는 태도였다.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을. 장난이었다고 생각해야지."

적음 형은 그렇게 호탕하게 말했지만 그것은 위선이었지 싶다. 적음 형은 술 앞에서 한 없이 비굴했다. 술 앞에서 바보가 되고 천치가 되었다. 때로는 교활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지도 몰랐다. 외롭고 막막했기 때문에 배운 술이 적음 형을 그렇게 만들었지 싶다. 작가 박인도 그렇게 괴로운 시절에 적음 형을 만나 깊은 연민을 느꼈음이 소설 속에 드러난다. 박인은 혈육처럼 끌렸던 적음 형의 모습을 소설 구석구석에 삽화처럼 그려 넣었다.

 

적음 형은 가정 사정으로 15세에 출가한 조계종 승려였다. 타고난 글재주가 있었다. 이를 기특하게 생각한 스승은 적음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보냈다. 학비도 대주었다. 적음은 수유리 화계사에 머물면서 미아리로 통학했다. 나는 서라벌 예술대학이 흑석동의 중앙대학교에 통합된 이후에 문예창작과에 다녔으므로 미아리 시절의 적음 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경주 지방의 산중에 있는 가난한 절에서 자라다가 시주의 도움으로 갑자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19세의 적음에게는 서울 유학 생활이 결코 평탄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적음 형을 1975년에 흑석동의 주점 앞 골목에서 처음 만났다. 두상이 헤밍웨이를 닮은 승려가 두툼한 뿔테 안경을 끼고 서서 나를 보고 헤벌쭉 웃었는데 실은 나를 보고 웃은 게 아니라 내 옆의 여학생을 보고 웃은 것이었다. 나는 적음 형의 눈이 사시라는 것과 술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러 이따금씩 흑석동에 출몰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작가 박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적음 형을 무척 따랐다. 우리 둘은 비슷한 데가 많았다. 둘 다 술을 참지 못했고, 한번 마시면 통금 시간이 되어 술집에서 쫓겨날 때까지 마셨다. 다 도망가고 둘이 남아 그렇게 마시다가 흑석동의 여인숙에서 잤던 날 새벽에 적음 형은 벽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헤어졌는데 적음 형은 다시 산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산에 가서 사흘만 죽은 듯이 누워 있으면 몸이 회복된다고 말하던 적음 형이 떠오른다. 시는 그럴 때 찾아온다고 했던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난 적음 형은 내 노트에 시를 한 편 적어 주었다. 다음과 같다.

 

두런두런

발 아래 풀잎 속에

정지된 공간의 틈서리에서

오 저기 저

버려진 鬼面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게 두런두런

만리로 열린 귀를 찾네

못 보고 못 듣는

두억시니로 여기 와서

내 문득

스산한 바람소리가 되네

 

- 절터 全文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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