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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2-6 / 적산가옥

김홍성
  • 입력 2020.12.28 22:46
  • 수정 2020.12.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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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 책꽂이 위에는 어머니 아버지 사진을 넣은 접이식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날 일동 고모가 트렁크처럼 생긴 작은 가방에 선물로 넣어준 것이다. 어른 양손을 합친 크기였고 펼쳐서 세울 수 있는 그 사진틀 좌우 상단에는 努力’ ‘成功이라는 문자가 좌우명처럼 붙어 있었다. 문자의 뜻을 강조하느라고 유리 가루를 입혀놔서 네 글자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 사진 위에 있는 글씨가 努力이었는지, 아버지 사진 위에 있는 글씨가 成功이었는지는 잊었다.

 

사진틀 뒤에 숨겨 두었던 하모니카는 아들이 노상 그걸 불다가 폐렴에 걸렸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바로 처분했겠지만 사진틀은 어떻게 됐을까? 성공도 포기하고 노력도 안 하게 된 어느 날 문득 부담스러워서 치워놨다가 거처를 옮기는 중에 분실했을 것이다. 

 

폐렴 소동이 있고 난 뒤의 기억은 뭉텅 잘려나갔다. 내 기억은 몇 달을 건너 뛰어 계동 할머니네 집을 더듬는다. 계동 할머니의 집은 이른바 적산가옥이었다. 휘문 고등학교와 대동 상업고등학교 사이의 비탈진 한옥 골목 끝에 있었다. 이층이지만 견치석 축대 위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계동 골목 어귀에서 보면 삼층집처럼 보였다.

 

방금 떠오른 기억이 있다. 계동집에 배어있던 특이한 냄새다. 그 때 그 집에서는 날마다 고추장이나 된장이나 신김치로 찌개를 끓였음에도 그것과는 다른 냄새가 배어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그 집에 들어섰을 때 맡은 그 특이한 냄새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가쯔오 부시 냄새였다. 왜정 때 그 집에 살았던 일본인 식구들이 끓여먹었을 가쯔오 부시 냄새는 해방 후에 20년 끓였을 고추장이나 된장 또는 신김치로 끓인 찌개 냄새로 덮을 수가 없었나 보다.

 

이층 건물은 본채와 별채 두 동이었다. 본채는 남쪽에서 볼 때 L 자이다. 별채는 L자 본체가 안고 있는 형국이다. 별채는 세를 주고 있었는데 훗날의 어느 장마철에 거짓말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세든 사람들이 모두 출타 중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돌계단을 올라서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게 되어 있었다. 마루는 방과 방 사이로 복도를 이루면서 나무 계단을 통해 이층까지 이어졌다. 그 계단 밑에 있는 방이 내가 이 집을 드나들면서 가장 오래 쓴 방이었다. 바깥 벽 쪽에 작은 창이 있었다. 그 창 바로 밑에 옆집 대문으로 이어지는 짧은 골목이 있었다.

 

현관 마루의 오른쪽 방이 응접실인데 몇 년 동안은 할머니 방이었다. 남향이어서 큰 창문으로 해가 잘 들었다. 창문 맞은편에는 외벽에 하얀 타일을 붙인 한옥이 있었다. 할머니의 방에서 바로 부엌으로 내려설 수 있는 마루 왼쪽에도 작은 방이 딸려 있었다. 이 방을 내가 쓴 적도 있다. 이 방의 창으로는 화신백화점 사장 저택을 받치고 있는 견치석 축대가 성벽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축대 밑 도로는 트럭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별채 맞은편의 큰 방에서는 큰삼촌(계동 할머니의 장남) 내외가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큰 방 한쪽 벽에 커다란 일본식 벽장이 있고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 부엌에 들어서면 또 작은 방 이 있었다. 큰삼촌의 자녀들은 이 방을 썼다.

 

별채 쪽으로 돌출된 변소는 이층이었다. 동그란 창이 하나 달려 있는 이층의 변소에는 오래된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었다. 1층 난방은 마루 밑 아궁이로 연탄을 밀어 넣는 온돌이었다. 연탄 창고는 부엌에서 통하는 마루 밑에 있었고 배달 온 연탄은 밖으로 통하는 부엌문으로 들어왔다.

 

이층에 있는 두 개의 방은 연탄난로로 난방을 했다. 하나는 아주 큰 방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작았지만 아주 작은 방은 아니었다. 장독대가 있고 빨래 너는 널찍한 베란다가 있었다. 나는 이 베란다 모서리에 보초병처럼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골목 끝 가각 위로 보름달이 나오는 걸 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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