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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2-5 / 곰보냉면집의 친척 모임

김홍성
  • 입력 2020.12.26 22:17
  • 수정 2020.12.2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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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4가와 청계천 4가 사이의 시계 골목에 냉면집이 있었다. 외가 친척들은 곰보냉면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서 맨처음 그 집에 갔던 때는 전학 수속을 하던 중인 1963년 5월이었다. 친척들이 앉아있는 방바닥에 장판이 아니라 쌀가마니를 튿어서 깔아놨었다.  

모인 친척들이 어른들만 열 명이 넘었다. 피난 나온 가족 모임이 이 정도면 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친척들이 남아있을지가 궁금했을 법한데, 그런 걸 물었던 기억은 없다. 계동 할머니처럼 전쟁 전에 삼팔선을 넘어 월남한 친척들도 있지만 일사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화물 수송선으로 월남한 친척들도 많았다. 하지만 더 많은 친척들이 이북에 남았다. 친척들은 석 달이면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 맨살이 꺼끌한 가마니에 닿는게 거북했던 느낌이 남아있다. 뜨거운 육수가 가득 든 주전자가 먼저 상위에 올라왔다. 컵에 육수를 채우고서 간장이나 겨자를 식성에 따라 첨가하여 훌훌 불면서 마셨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경도 사투리는 왠지 모르게 정겨웠다. 고향 음식이 있고, 고향 사투리가 들리는 곳에서 친척들이 만나는 이유를 나는 훗날에 오랜 여행을 하면서 어렴풋이 느꼈고, 나중에 네팔 땅에서 9년을 살 때는 절실히 느꼈다.

 

가족 모임의 좌장은 계동 할머니였다. 외할아버지 형제 다섯 명 중 막내의 부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숙모였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라고 부르며 회상한다. 나는 계동 할머니가 친 외할머니인 줄만 알고 자라던 시절이 있다. 어머니 집안은 함흥에 살 때부터 사촌들도 한 집에 살았던 시절이 길었던 만큼 월남한 후에도 친형제처럼 지냈다.

 

계동 할머니가 아직 새댁이었던 1938년에 그 분의 손윗동서인 나의 친 외할머니는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어머니는 그 때 9세였다.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 몇 명은 굿을 하겠다고 만신을 부르러 출타해 있었고 9세 소녀가 3세 동생을 업고 마당을 서성이며 어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니는 내가 업은 동생을 내려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동생을 옆에 누이고 젖을 물렸다. 잠시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동생은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기까지만 말했는데 나는 가끔 그 후의 일들을 상상한다. 어른들이 돌아와서 죽은 어머니의 젖에서 애를 떼어 냈더니 애가 깨서 울었다든지, 9세 소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애를 업고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든지 하는 상상 말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그럴 듯해 질 것처럼.

 

그 때 정릉 큰아버지는 15세였다. 훗날 계동 할머니는 조카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화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릉 큰아버지가 1985년에 낸 화집의 첫 페이지에는 이 화집을 어머님께 바칩니다.’라는 굵은 활자가 인쇄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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