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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2-2 / 밥상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아이

김홍성
  • 입력 2020.12.23 19:11
  • 수정 2020.12.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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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큰아버지 집 식구들은 커다랗고 둥그런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 일요일 점심 상에 올린 상추는 큰어머니와 내가 뒷마당에서 같이 뜯었다. 큰어머니, 그러니까 외숙모는 절구로 으깬 멸치를 고추장 된장에 섞어서 쌈장을 만들었다. 쌈장은 가지찜에도 들어갔다. 봄에는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짠무를 얹어 먹기도 했다. 겨울 내내 독에서 숙성된 짠무는 맛이 좋았다. 도시락 반찬이 되기도 했다.

수제비를 만들던 기억도 난다. 마당에 연탄이 든 화덕을 놓고 큰 들통을 올렸다. 들통에서 끓는 물속에 들어 있는 야구공만한 양철통에는 멸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툇마루에 앉은 누이들이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었다. 반죽 떼어 넣는 걸 어깨너머로 구경만 하던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반죽에 손을 댔는데, 누군가 내 손을 탁 치는 바람에 반죽이 그릇째 흙바닥에 굴렀다. 누가 내 손을 쳤는지는 모르겠다.

큰아버지는 특히 밥상에서 엄했다. 우선, 소리 나게 먹는 것을 금했다. 수저가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는 물론 먹으면서 쩝쩝거리는 것도 일일이 지적했다. 밥그릇 째로 국에 말아 버리는 것도 금했다. 나도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얼추 배우기는 했지만 큰아버지의 엄한 기준에는 늘 미달이었다. 밥 먹으러 들어오면서 방문을 열고 닫을 때에도 다소곳해야만 했다. 배고프다고 문을 확 열고 탁 소리 나게 닫으면 꾸중을 들었다.

큰아버지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므로 밥 먹을 때 꾸중 들을 일은 별로 없었다. 꾸중을 듣는 아이는 주로 나였다.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수저를 놓지 않고 밥 먹는데 열중했다. 그래서 밥상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게 되는 아이는 항상 나였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사남매에게 밥상을 차려주고는 항상 '누가 빨리 먹는지 보자'고 경쟁을 시켰다. 어머니는 제일 먼저 먹고 숟갈을 놓는 자식을 향해 ‘ 일등하면서 박수를 쳐 주었다. 대체로 내가 일등이었다. 나는 밥을 씹지 않고 삼켜도 소화가 되는 특이 체질이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외가의 어머니 형제들은 밥을 얼마나 먹었는가에 따라서 변보는 횟수가 달랐다. 조금이라도 먹으면 한 번, 적당히 먹으면 두 번, 많이 먹으면 세 번도 눴다고 했다.

해방되기 훨씬 전의 함흥 시절, 그러니까 아직 소년이었던 큰아버지가 당신의 집안 어른들 중 한 분에게 거의 매일 굶다시피 한다고 했더니, 그 어른은 하루에 몇 번 변을 보냐고 물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최소한 한 번은 매일 본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그 어른은 그러면 잘 먹는 거다라고 하는 걸 어머니가 옆에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의 형제들 중의 몇몇은 밥을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바로 변소로 가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변소가 하나 뿐인 정릉의 그 집에서 큰아버지와 나는 바로 그런 점이 닮았다. 밥 빨리 먹기 선수인 내가 숟가락 놓자마자 변소에 가서 앉아 있을 때 큰아버지가 밖에서 서성거린 일이 몇 번 있었다.  

하루는 금방 끝을 낼 것 같아서 잠시 시간을 끌다 나왔는데, 변소에 들어갔다 나온 큰아버지가 나를 불러 너는 어떻게 밥을 그렇게 빨리 먹고, 게다가 먹자마자 변소로 달려가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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