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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몽키 키우기] 다리를 세는 밤

안소랑 전문 기자
  • 입력 2020.12.19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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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몽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식사를 주어야 합니다.
내면에 자라는 씨몽키가 거대한 물고기가 되어 바다로 향할 수 있도록.

 

 

다리를 센다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하얀 다리들

비상등이 명멸하는 복도 끝의 인쇄실에서

복도는 밤이면 흩날리는 종이 인형처럼 푸른빛의 절지동물로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장염이 돈다고 한다

소독약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면

장이 꼬여 꿈틀거리는 다리, 지네, 다리

허벅지에 잔뜩 묻어 있는 하얀 가루를 털어내면

나는 종종 집에 가는 길이 적힌 지도를 잃어버린다

 

복도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하얀 실핏줄이 툭툭 터져버린 다리들이 걸어온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거기가 밖인 줄 알고 틈을 찾아 고개를 처박는 습성이 있다

 

여름 장마가 지면 산사태가 난다고

모든 잡목들이 기운다 잘린 다리들을 밑동마다 걸어두고 기도를 한다

하얀 걸 보면 물들이고 싶어지니까

이웃들은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라고 한다

나무들은 웅크린 뿌리 사이에 키워둔 다리들을

옥상 시계가 소리를 내며 붉어질 때 풀어놓는다

 

아침에서 낮으로 낮에서 아침으로

복도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계절의 가운데 하얀 선이 그어지면

나는 더 이상 집에 갈 다리가 없고

 

허리를 펴본다

선배는 지나치게 꼿꼿하게 걷는다 거추장스러운 다리를 버렸다는 증거다

거울 아래에 죽죽 그어진 붉은 자국들,

완전히 나가버린 형광등처럼 눈이 멀고도 이상하게 자꾸 눈이 부신다

 

하루종일 좁은 방안에서 웅크리는 밤

파쇄기는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제가 가진 독을 뿜는다

고장난 글자들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분사들이 눈가에 묻는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흔적이라고

동물이 무너지면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마지막 다리들이라고 외친다

 

외친 흔적들이 다리로 쌓인다

팔뚝마다 베인 상처가 지나간다

죽은 계단이 복도에 말라붙어 있는 밤이다 깜빡, 깜빡 복도가

죽은 다리들을 끌고 비상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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