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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와 상실

이주형 전문 기자
  • 입력 2020.12.21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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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와 상실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내가 상상하는 100년 후 미래의 포스터를 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시 학급에선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미래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도래할 거라는 그림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본인은 절대적인 디스토피아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기 오염과 전염병 등으로 모두가 마스크와 방독면을 착용하고 다니는 미래인의 모습과 뿌연 하늘의 미래를 그려내곤 했다.

그런데 100, 50년 이후도 아닌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벌써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거리에 나올 때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마스크를 철저히 쓰고 있는 풍경을 보면 이 시국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마스크를 쓰고 감염을 경계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사회. 분명 시민의식이 돋보이고 모두에게 권장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이지만 이는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위기라 말할 수 있다.

본인은 청각 장애인이다. 유소년기 대부분을 수술과 재활로 보냈다. 그래도 외로움은 알지 못했다. 주위에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어른들도 있었고 심심하면 꺼내 볼 수 있는 교구와 책들도 있었다. 빨리 다 낫고 병원을 나가 또래 친구들을 사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퇴원 이후 그토록 고대하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외로움을 알게 됐다. 사소하게 생각했던 신체적 차이는 또래들과 교류에 있어 꽤 큰 차이였고 이를 좁힐 수 있는 매개체가 없으니 자연스레 겉돌게 됐다. 차츰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침묵이 길어지니 말을 하는 법도 잊게 됐다. 확실히 현실은 매웠다.

인간관계의 겨울을 끝내기 위해 참 부단히도 노력했다. 난청이 와 청력 손실로 인해 보청기로도 소리를 못 듣게 된 이후에도 수어가 아닌 구화를 연습했다. 대화를 할 땐 주제와 상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말을 꺼내는 개인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입모양을 항시 보며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힘은 들었지만 타인과 형성된 유대감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려움이 왔다. 거리두기를 위해 모두가 마스크를 쓰니 나도 덩달아 거리두기를 당했다. 그렇다. 마스크를 쓰니 더 이상 상대의 입모양을 볼 수 없어진 것이다. 소통의 거리두기가 온 것이다.

입모양이 안 보이는 소란스러운 침묵 속에 있는 건 괴로운 일이다. 대화가 오고 가는 게 눈에 보이는데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눈뜨고 당하는 무력감이 몸을 엄습한다. 일상 속에서 내 자리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 얇은 마스크 한 장이 큰 언어장벽으로 작용한 것이다. 대화에 끼지 못하게 되니 점차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됐다. 내 안에 충만했던 유대감이 소실되는 것이 느껴져 괴로웠다. 확실히 모르는 게 약이다.

언젠가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때를 맞이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마주 보고 한 줄, 두 줄 채워 나가려 한다. 그간 얘기하고 싶었던 것들, 애써 외면했던 것들, 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끄적이다 보면 이 괴로움이 끝나리라 믿는다. 시린 겨울이 와도 꽃은 다시 핀다.

정말 싫은데 필요한 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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