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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운용 씨는 정부의 반대 극복하고 어떻게 IOC 위원이 되었을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10.1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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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린 2012 세계태권도한마당에서의 김운용.(사진=위키피디아 갈무리)

국제올림픽위원회 즉 IOC 위원은 무보수 이지만 ‘올림픽 개최지 결정’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에 대한 의결권을 갖고 있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각국에 파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IOC 위원 한명 한명이 바로 IOC를 대표하는 IOC대사 역할을 하기 때문에 IOC위원들은 각국을 방문을 할 경우 ‘국가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선진국은 대개 올림픽 금메달, 혹은 올림픽 출전 경력을 갖고 있는 선수 출신이거나, 스포츠 스타플레이어, 왕자나 공주 그리고 그 나라의 덕망 있는 인사가 IOC위원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후진국일수록 스포츠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IOC위원을 차지하고 그 지위를 이용해 각종 이권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의 초대 IOC위원인 이기붕 씨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비서, 서울시장, 국방부장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1951년에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는 등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기붕 씨는 1954년 민의원에 출마, 당선 된 후 민의원 의장에 올랐고, 그 지위를 이용해 1955년 초대 IOC위원이 되었다. 당시 이승만에 이어 실질적인 2인자였다.

이기붕은 1960년 3월15일 대통령 선거에서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 장교 이던 장남 이강석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2대 IOC 위원 이상백 씨는 이기붕 씨 만큼 권력을 없었지만, 그 대신 학계, 스포츠 계에서 스펙이 매우 화려했다.

이상백 씨는 대구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속 제일고등학원을 졸업했다.

1924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농구 부 주장이 되었고, 와세다 대학원에서는 동양학을 전공했다.

일본에서는 농구계 뿐 만 아니라 체육계 전반에 걸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해 일본 체육회 전무이사 까지 지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문학박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조선왕조사 연구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체육인으로서는 8·15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 위원장이 되고, 1946년 조선체육회 이사장,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등 3번의 올림픽에서 한국올림픽 대표 팀의 단장 등을 지냈다. 1964년 2대 IOC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1966년 사망, 2년 밖에 활동하지 못했다.

3대 IOC 위원 장기영 씨는 언론계 체육계에서 화려한 스펙을 자랑한다.

장기영 씨는 1934년 선린상업학교(지금의 선린 인터넷 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입사, 1948년 조사부장이 되고, 1950년 부총재에 승진하였다.

한국은행에 입사 한지 19년 만인 1952년에는 언론계로 자리를 옮겨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였고, 1954년 한국일보를 창간하고 기존의 코리아타임스 사장을 겸하였다.

장기영 위원은 1961년 국제 언론인협회(IPI) 국내 초대회장이 되고, 그 해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196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기용되었다. 2대 IOC 위원 이상백 씨가 사망한 이듬해 3대 IOC 위원이 되었다.

4대 IOC 위원인 김택수 씨는 정 재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김택수 씨는 1952년 서울 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1963년 박정희 정부의 출범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곧 바로 국회의원 선거(김해)에 당선되어 이후 원내총무를 맡는 등 민주공화당내 실력자로 군림한다.

1961년 경상남도체육회 회장을 비롯하여, 1966년 아시아 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겸 세계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 1971년에는 대한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위원장을 맡았고, 1977년에는 IOC 위원이 되었다.

5대 IOC 위원 박종규는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다.

박종규 씨는 5·16군사혁명 성공 후 박정희의 경호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과 동시에 경호 대장, 그리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여 청와대경호실차장을 거쳐 1964년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승진하였다.이후 교육계와 체육계에 관여하여 학교법인 경남학원을 설립, 경남대학 이사장, 대한사격연맹 회장, 아시아 사격연맹 회장직 등을 맡기도 하였다.1974년 8월15일 재일동포 문세광에 의한 대통령저격사건으로 인하여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책임을 지고 경호실 장에서 물러난 뒤 세계 사격연맹 부회장, 19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현 창원))에 당선, 공화당 체육 분과위원 장을 역임하였다.1979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 태릉 푸른 동산 이사장, 아시아경기단체총연맹회장을 거쳐, 4대 IOC 위원 김택수 씨가 사망(83년) 하자 이듬해인 1984년 IOC 위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초대 IOC 위원 이기붕 씨부터 5대 IOC 위원 박종규 씨 까지 한국의 IOC 위원들은 정계, 재계, 학계 등에서 모두 정상권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6대 IOC 위원인 고 김운용 씨는 외무부장관 비서관, 주미한국대사관 참사관, 대한태권도 협회장, 국기원 설립, 세계태권도 연맹총재가 경력의 전부일 정도로 선배 IOC 위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펙이 뒤졌다.

더구나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은 국내외 태권도계에서 잡음이 일고 있는 터라 수장인 김운용 씨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 전경환 씨를 내세워 정화를 하려고도 했었다.

IOC 위원이 되려면 그 나라 정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서는 곤란하다. 특히 후진국가에서는 거의 절대적이다.

청와대는 김운용 씨가 IOC 위원이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운용 씨는 양동작전을 폈다.

국내에서는 전두환 대통령 친구로 차기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씨를 설득했고, 자신의 연세대 후배 체육부장관 이영호 씨도 엄호사격을 하도록 했다.

외국에서는 당시 IOC 위원장인 고 안토니오 사마란치와 핫라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에 이어 2인자 역할을 했었던 노태우 씨와는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열차에 함께 탑승을 해서 4~5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환심을 사서 자기편 사람으로 돌려놓았고, 사마란치는 태권도를 매개체로 자주 접촉을 해서 많은 환심을 사고 있었다.

사마란치는 내심 김운용 씨를 한국의 6대 IOC 위원으로 내정해 놓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자꾸 다른 사람을 추천하니까 나중에는 한국 정부에 거의 협박을 하다시피 했다.

“한국에서 86서울 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IOC 위원 없이 치르려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사마란치의 협박 아닌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다.

김운용 씨는 IOC 위원이 된 이후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능력과 특유의 친근한 마인드로 세계스포츠계의 거물로 성장, IOC의 돈 줄인 텔레비전 분과위원장, IOC 부위원장 까지 지냈다.

김운용 씨는 IOC 위원으로 있으면서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이건희 씨가 IOC 위원에 선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한국 스포츠외교 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공(功過)이 큰 만큼 과(過)도 커서, 개인비리 등으로 IOC 부위원장 등 모든 공직에서에서 물러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었다.

김운용 위원이 물러난 이후 한국 스포츠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3수만에 겨우 유치 성공’ ‘2022년 월드컵 유치 실패’등 스포츠 외교부재를 절감하고 있다.

김운용 씨 이후 앞서 언급한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박용성(두산 그룹 회장) 등이 IOC 위원이 되었고, 국제유도연맹 회장 자격으로 IOC 위원이 되었던 박용성씨는 국제유도연맹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IOC 위원직을 내 놓았다. 최근에는 이기흥 씨가 대한체육회장 자격으로 IOC 위원에 선임 되었고, 유승민 위원이 선수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IOC 위원은 115명의 정원(평균 110명 정도)을 유지하고 있다.

개인자격 위원 70명, 유승민 씨 같은 선수위원 15명, 유도 복싱 핸드볼 등 국제경기 단체장 15명 그리고 이기흥씨 같은 각 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5명 등이다.

1966년 이전에 IOC 위원이 된 사람들은 자격이 본인이 사망할 때 까지 영구적으로 유지되고,

1966년 이후 1999년 이전에 IOC위원이 된 사람들은 만 80세까지 자격이 유지된다. 그러나 1999년 이후에 IOC 위원이 된 사람들은 IOC 위원의 노령화를 막기 위해서 임기가 70세로 제한이 된다.

또한 동, 하계올림픽 때 선수들이 직접 뽑은 선수 IOC 위원들의 임기는 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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