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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의 사회학

천원석 칼럼니스트
  • 입력 2020.10.1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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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엄기호는 그의 책 단속 사회에서 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조망한다. 엄기호가 말하는 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이다. 때로는 신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곁에서 듣는 이야기는 고통 혹은 슬픔에 찬 이야기가 많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정연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명과 한숨, 절규와 한탄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들이다. 마치 고장 난 시디플레이어처럼 같은 말이 반복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들으며 말하는 이의 말이 말로 들릴 때까지 반복하여 곱씹고 끊임없이 물으며 들어야 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 곁을 이제는 편으로 메꾸어간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이야기, 반론을 펴면 이내 곧 누구 편이냐 되묻고 상대를 내친다. 이렇게 편을 강요하는 언어에는 반성이나 성찰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편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지지 혹은 적대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지하는 쪽은 무조건 옳고 반대편은 무엇을 하더라도 틀리게 된다. 그래서 편의 언어는 단순하며 일방적으로 말할 뿐이다. 이때 듣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옳소뿐이며 다른 말은 침묵 될 뿐이다. ‘아니요라고 말하면 적으로 지목되어 내쳐진다.

이처럼 일상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을 강요하며 을 파괴해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내부적으로는 자신과 다른 편에 있는 이들은 차단하고() 자기 편과는 연결()한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다른 편에 속한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한 무차별적 폭로를 감행하게 된다. 본래 폭로는 말하기가 억압되고 말하기에서 배제된 자가, 자신에게 말할 권리를 배분하지 않고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정치공동체정치 없음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였다. 따라서 가정, 학교, 직장 폭력 등에 의한 희생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몸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기가 폭력을 당하고 있음을 말해 보았지만 전혀 반향이 없을 때 그들은 죽음으로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죽음은 아무리 말하려 해도 전혀 듣지 않는 사회를 향해 그들이 고통을 알리는 마지막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 이 폭로의 정치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요즘의 폭로는 제도, 조직 내에서 해결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대중들에게 직행한다. 문제가 벌어진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해결하기보다는 그 사건을 대중들에게 폭로하고 이슈를 만드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오늘날의 폭로는 말할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배제된 사람들이 아닌, 말할 권리를 충분히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공론을 통한 해결은 사라진다. 폭로의 목적이 문제의 해결이 아닌 사냥하고 매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의 폭로전은 폭로가 더이상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마지막 수단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정치판에서의 폭로는 폭로된 사람을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하는 것일 뿐이며 문제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과거에 폭로는 가해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구조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1990년 윤석양 씨의 보안사령부 민간인사찰에 대한 폭로가 대표적인 사례로, 결국 윤씨의 폭로로 인해 보안사는 이름도 기무사로 바뀌게 되었고 보안사 서빙고 건물도 헐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폭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권력이 아닌 그 사람이 얼마나 개새끼인지를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즉 권력의 구조적 문제를 넘어 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한 집중과 그 사람의 도덕적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뻥튀기된다. 심지어 십수 년 전의 발언과 일상까지도 다 끄집어내진다. 정치가 가십이 되는 것을 넘어 가십이 정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폭로는 자질 검증이 아닌 단지 추문을 일으키기 위한 것들이 될 뿐이다.

작년 조국 장관에서 시작되어 윤미향과 추미애 장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그들에 대한 폭로는 그들을 단지 개새끼로 만들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익도 공익도 무시한 채 오직 의 논리에 따라 치졸한 공세와 악다구니만 퍼붓는 염치도 모르는 자들에게 단지 연민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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