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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복서 김득구, 어머니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10.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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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시니 선수와 경기를 펼치는 김득구 선수의 모습

1983년 1월30일 각 일간 신문은 지난해(1982년 11월18일) 사망한 비운의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 양선녀(당시 67세)씨가 1월29일 오후 2시30분 경 음독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했다.

양씨는 아들 김득구의 시신을 동네 뒷산에 묻은 후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남편 김호열(당시 66세)씨가 집을 비운 낮 시간이면 혼자 단칸방에서 아들의 유품인 복싱가운, 운동화, 트레이닝 복, 복싱 글러브 등을 안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양씨는 아들의 49제를 지낸 1983년 1월4일, 마치 아들의 분신인양 소중하게 간직해 왔던 유품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때 부터 벽에 걸린 아들의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나도 저놈을 따라가야지”라며 통곡을 하곤 했었다.

양씨는 김득구가 숨진 뒤 받은 보상금으로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오리나무 골에 아들의 묘를 새로 단장하기 위해 6백평의 땅을 사들이고, 마을 주민들을 위해 당시로는 거금인 150만을 들여 민간유선 방송 시설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고성군 체육회에 5백만 원을 기증하는 등 비명에 간 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업을 벌였다.

이같이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던 양씨는 남편 김씨에게 “내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면 수의를 따로 만들지 말고 내가 미국에서 (김)득구가 사경을 헤맬 때 입고 있던 한복을 입혀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득구 곁으로 가면, 동네 뒷산 ‘김득구 공원묘지’에 묻어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러니까 양씨는 아들 김득구가 사망 한 이후부터 줄곧 ‘죽음’ 또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지우지 않은 듯하다.

양씨에게는 김득구 뿐 만 아니라 배 다른 아들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 김호열씨가 전 처 사이에 낳은 김근식(당시 41세), 근익(당시 39세)씨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 삼형제 가운데서도 돌멩이처럼 험하게 살아온 자신이 낳은 김득구를 가장 불쌍하게 생각해 왔었다고 한다.

양 씨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자살을 하면서도 유서한통 남기지 못했다.

그러면 양씨는 왜 자살을 한 것일까?

양씨는 김득구가 미국의 레이 멘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에서 14회 KO패를 당한 뒤 사경을 헤매다가 최종 사망이 확인된 11월17일 오후 5시55분(미국 현지시간)부터 불과 25분밖에 지나지 않은 6시20분, 김득구의 유해가 안치된 라스베이거스 데저트 스프링스 메디컬 플라자 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 아들의 영원한 삶을 위해 필요한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한국 사회에서 장기 기증문화가 거의 없던, 당시로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러면 양씨의 자살이 단지 불쌍한 아들 김득구의 사망 때문인지, 아니면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장기기증을 타의로 한 죄책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김득구과 맨시니의 세계타이틀전이 벌어지던 시점으로 되돌아 가 보자.

1982년 11월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 링 에서 세계타이틀이 벌어지기 직전 예상은 21살의 젊은 챔피언 맨시니가 27살의 아시아 출신 복서 김득구 보다 6대4 정도로 우세하다는 게 국내외 복싱 인들의 전망이었다.

맨시니는 폭발적인 좌우 훅을 상표로 ‘붐 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특급 챔피언이었다.

맨시니는 미국선수로는 드문 백인 세계챔피언 이었다. 더구나 복서 출신인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뤄냈다는 드라마틱한 요소도 그의 높은 인기에 한 몫을 했다.

김득구도 맨시니의 엄청난 펀치 위력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링 위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싸우겠다”며 죽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김득구는 공이 울리자 배가 고프고 서러웠었던 17년간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통렬한 왼손 스트레이트(김득구는 왼손잡이)를 맨시니의 안면에 터트리기 시작했다. 맨시니도 챔피언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양 훅을 구사하며 김득구의 안면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9라운드 까지는 김득구가 1~2점을 앞선 내용이 경기였다.

10라운드, 잘 싸우던 김득구는 맨시니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자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주심이 김득구에게 반칙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김득구의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해 13라운드까지 오히려 2~3점이 뒤졌다.

운명의 14라운드, 김득구는 자신은 도전자고 맨시니가 세계챔피언 인데다, 원정경기라는 점을 감안, 판정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공이 울리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맹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득구의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김득구의 라이트 훅이 크게 빗나가자 오히려 맨시니의 라이트 훅이 김득구의 안면에 작렬했다. 김득구의 크게 휘어 치는 레프트 훅이 빗나가자, 다시 맨시니가 김득구의 턱에 묵직한 라이트 훅을 터트렸다.

충격을 받은 김득구는 뒤로 쓰러지면서 로프에 2차 타격을 입었다.

주심은 김득구가 일어서려다 로프를 잡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자 카운트도 없이 곧바로 맨시니의 KO승을 선언했다.

김득구는 KO패를 당한 뒤 일단 일어서서 코너에 있는 의자에 앉았으나 그 후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김득구는 들 것에 실려 데저트 스프링스 메디컬 플라자 병원에 쓰러진지 25분 만에 도착. 1차 수술을 받은 뒤 약 6시간이 지난 14일 새벽 1시, 차차 호전되어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1차 수술을 집도 했던 헤머그램 박사는 “수술 경과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눈동자의 반응이 살아나고 있어서 2차 수술을 계획을 취소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헤머그램 박사의 수술 소견과는 달리 김득구의 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고, 급기야 소생불능 즉 식물인간이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김득구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TV로 아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던 어머니 양선녀 씨는

“집에는 MBC-TV가 나오지 않아 간성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경기를 지켜봤는데, 13라운드부터 정전이 돼 경기의 마지막 부분은 보지 못했다. 아들이 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미국에 갈 여비가 없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양씨가 돈이 없어서 아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미국에 갈 수 없는 형편을 큰형 근식 씨가 한국 권투위원회에 연락, 양씨는 체육부의 주선으로 미국에 갈 수 있었다.

양씨는 김포공항을 떠나면서 “내 아들을 꼭 살려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득구가 죽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내 아들이 왜 죽어!”라며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매스컴들은 세계타이틀매치 도중 도전자가 죽음 직전에 이른 사건이기 때문에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양 씨는, 양의사 뿐 만 아니라 LA에서 데려온 한의사 4명이 치료를 포기하자 김득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던 산소 호흡기를 떼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득구가 사망하자 ABC-TV, NBC-TV 등 대부분의 미국 방송들은 김의 사망 소식을 5분 정도씩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보도를 했다.

더구나 양씨가 아들의 장기를 기증 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자 미국 매스컴들은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라스베이거스 선’지의 조지 스타이리시 기자는 “김득구 어머니의 장기 기증은 동서양을 초월한 생명의 외경 사상을 보여줘, 전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보도를 했다.

양 씨(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의 ‘기습적인 김득구 장기 기증’은 거의 일주일 동안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김득구 사건’의 대미를 장식한 셈이었다.

그런데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던 양씨의 장기기증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당시 김득구 아버지 김호열 씨는 “아니 제 심장을 달고 가야지 남에게 떼어 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설사 장기 기증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해야지......아마 누가 제 집사람을 집요하게 설득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후에 양선녀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을 때도 “아들을 먼저 보낸 게 가슴 아팠겠지만, 만약 누가 시켜서 아들의 장기를 기증했다면 더욱 괴로웠을 겁니다. 오죽하면 농약을 마셨겠습니까”라고 안타까워했었다.

1982년 11월, 5공화국이 미국의 견제를 받으면서 한창 극성을 부릴 때 였다.

당시 김득구의 장기기증으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 졌던 게 사실이다.

김득구의 사망은 어머니 양 씨의 자살 뿐 만 아니라, 그 경기의 주심을 맡아봤던 리처드 그린씨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그로부터 7개월 후에 자살했고, 당사자인 맨시니도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었다.

프로복싱은 김득구 사망 이후 세계타이틀 매치를 15라운드에서 3라운드 줄여 12라운드로 치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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