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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시리즈, MBC청룡 김동엽 감독은 고의로 패 했을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10.0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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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엽 감독 생전의 모습(사진=THE위키 제공)

김동엽 감독의 MBC청룡,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과연 고의로 패 했을까.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존재하는 한 1983년 전기리그 우승팀 해태(기아) 타이거즈와 후기리그 우승팀 MBC 청룡의 한국시리즈는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MBC 청룡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나타나는 데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가 9번을 우승해 우리나라 프로야구 최고 명문 팀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MBC 청룡의 김동엽 감독은 1997년, 59세를 일기로 돌연사를 당했기 때문에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83년 MBC 청룡과 해태 타이거즈 팀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볼 때 해태에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이 입단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MBC가 약간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투수력은 MBC, 타력은 해태가 약간 나았지만, 단기전 승부는 마운드에서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MBC에는 2.33의 방어율 1위를 기록한 하기룡, 0.682의 승률 1위 고 이길환(췌장암 사망)을 비롯해 오영일, 정순명, 이광권, 유종겸 등의 투수진이 모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해태는 김성한이 투, 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었고, 김용남, 이상윤, 황기선 그리고 재일동포 주동식 투수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해태는 김일권, 김성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김 씨 종친회를 이룬 타자들이 공격을 이끌고 있었고, MBC는 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이종도, 신언호가 중심 타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MBC의 김동엽 감독이 코리언시리즈(당시는 한국시리즈를 코리언시리즈라 불렀다) 전체를 좌우할 1차전 선발 투수에 그동안 ‘신무기를 장착한 언더핸드 투수 이광권을 내겠다’던 팬들과의 약속을 깨고 투구 폼이 흔들리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던 오영일을 기용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한국 프로야구 첫 우승을 노렸던 해태 김응룡 감독은 예상했던 대로 원자탄 투수 이상윤을 기용했다.

해태는 1회 말 공격부터 오영일을 두들겼다. 1번 김일권 좌전안타, 2번 김일환 데드볼, 3번 김성한 3루수 실책으로 무사 만루. 해태는 5번 김종모의 2타점 2루타 등으로 3점을 얻어 앞서 나갔다.

해태는 2회에도 집중 2안타로 1점을 더 얻는 등 5회까지 집중 10안타로 7점을 뽑아냈다.

그런데 김동엽 감독은 비참할 정도로 두들겨 맞고 있는 오영일 투수를 교체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방치하는 듯해 프로야구 1년 농사를 마무리 하는 수장다운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오영일은 완투패를 당했다.

오영일은 후에 평소의 김 감독이라면 상대 팀 타자 개개인에 대한 지시를 하나하나 꼼꼼히 하는 스타일인데 그날 김 감독은 분명히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1차전이 적지인 광주에서 했기 때문에 경기를 일찍 포기해서 그런가하고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1차전이 끝난 뒤 광주의 해태 팬들 사이에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사태(광주 민주화 운동을 당시는 그렇게 표현했다) 등으로 사기가 떨어진 광주 시민들을 프로야구 우승으로 무마하려고 MBC 청룡(특히 김동엽 감독)에게 로비를 했다”

“김동엽 감독이 광주 깡패들에게 협박을 당해서 져 주기로 했다” 등 MBC의 이해 할 수없는 패배를 놓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잠실에서 벌어진 코리안시리즈 2차전에서는 더욱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잠실야구장을 찾은 3만500명의 야구팬들은 MBC의 김동엽 감독이 1차전 장소가 해태 홈구장인 적지인데다가, 투수교체 시기를 놓쳐서 뼈아픈 1패를 당한 것으로 보고 설욕전을 기대하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 경기가 시작되기 전 유종겸을 선발로 내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마 2회 내지 3회에는 에이스 하기룡이나 이길환으로 바꿀 거야” “아냐 유종겸은 가짜 선발이고, 공 몇 개 던지고 (하)기룡이로 바꿀 꺼야“라며 쑤군거리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유종겸을 깜짝 선발로 내 세운 것은 ‘원 플러스 원’으로 여긴 것이다.

유종겸은 2회까지 해태 타선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문제의 3회 초 해태 공격. 유종겸은 선두 타자 서정환에게 안타를 얻어맞은 뒤 차영화를 볼넷으로 내보내 무사 1,2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이 때가 유종겸을 다른 투수로 바꿀 적절한 기회였다.

유종겸은 힘에 부치는 지 자꾸 어깨를 추스렸다. 그 때 해태에서 전혀 예상치 않은 더블 스틸을 성공시켜 무사 2,3루가 되었다.

그러자 김응룡 감독이 승부수를 띄었다. 김일환 대신 양승호(전 롯데 감독)을 대타로 기용했다. 그렇다면 MBC도 강속구 투수인 하기룡이나 컨디션이 좋은 이광권(전 SBS 해설위원)으로 교체를 할 만 도 한데 김동엽 감독은 계속 팔짱만 낀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양승호는 구위가 떨어진 유종겸을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로 통타, 해태가 2대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 후 해태가 3점을 더 내고 MBC가 한 점을 만회해 7회까지 5대1로 해태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7회말 MBC 공격에서 에러와 안타 2개를 묶어서 3점을 따라 붙어 이제 4대5로 한 점 차가 되어서 승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MBC가 투수를 바꿔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는 거였다.

그러나 김동엽 감독은 8회 초에도 유종겸을 그대로 마운드에 올렸다. 유종겸은 집중 4안타를 얻어맞고 3점을 더 내주면서 연신 덕 아웃을 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요청했다.(유종겸은 이때 힘이 소진 돼서 덕 아웃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김 감독은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유종겸이 형편없이 얻어맞고 있는데도 투수 교체를 하지 않자 MBC 응원석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김동엽, 돈 먹었다”

“김동엽, 물러가라”

해태 응원석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이거 프로야구야 아마추어 야구야”

“김 감독 왜 저래”

코리언시리즈 1,2차전을 납득할 수 없게 해태에게 내 준 MBC는 결국 83년 코리언시리즈에서 해태에게 1무4패로 패하고 말았다.

왜 김동엽 감독은 코리언시리즈 1,2차전에서 상식에 어긋나는 투수운용을 했을까?

그러면 83년 코리언시리즈 1,2차전 고의패배 의혹을 갖고 있는 김동엽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김동엽 감독은 풍운아였다. 그러나 술이 한잔만 들어가도 난폭해 지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말년에 부인, 자식들과 헤어져 혼자 살았다.

1938년 10월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평소에 ‘난 38 따라지야’라는 말을 자주했다. 6.25 때 월남해서 부산의 토성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 경복 중, 고등학교와 성균관 대학을 나와 해군, 조흥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선수생활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심판생활도 잠깐 했었다.

1971년 건국대학교 창단 감독을 시작으로 창단 감독만 4번 했고,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는데, 프로야구가 생기기전 아마추어 롯데 팀을 맡아 동계훈련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구보를 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으로 13번 우승을 차지했지만 또한 13회나 감독직에서 해임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래서 평소에 ‘잘라라 잘라’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1982년 1월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이거즈 팀을 맡았지만 시즌 시작 직후 인 4월28일 경질 돼 프로야구 최단기간 감독으로 남아 있다.

프로야구 감독 때에는 빨간 장갑을 끼고 독특한 제스처와 쇼맨십 등으로 관중들을 사로잡아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김동엽 감독은 1997년 4월10일 혼자 살던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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