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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기

이주형 전문 기자
  • 입력 2020.10.05 20:11
  • 수정 2020.10.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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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나는 오늘 그대에게 평소의 사담이 아닌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 본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외행성에 불시착한 표류자의 마지막 고백이자 기록입니다. 자아의 상실에서 오는 두려움을 친구여 당신은 아시나요?

 

이름 모를 병원. 나를 껴안고 우시는 부모님. 귓속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지금도 생생히 되감기는 장면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보청기를 장착한 때이고, 처음으로 내 이름 석 자를 들었던 때입니다. 이때 내 몸을 지배한 것은 ‘듣는다’라는 환희가 아닌 ‘들린다’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감각.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강제로 밀려오는 정보들. 위협으로 가득 찬 소음들. 처음으로 공포를 알게 된 것은 다섯 살이었습니다.

 

나는 잘 깜박하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내 귀도 고향별에 두고 왔나 봅니다. 어른들은 내 분실물에 대해 이는 큰 문제고 고쳐야 한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님이 원하기에 그리했습니다. 이후 내 세계는 병원으로 한정됐습니다. 좋지 않은 균형감각으로 휘청거리던 몸의 중심을 효율적으로 잡아 주던 팔자걸음도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고쳤습니다. 단순히 앵무새처럼 들리는 대로만 따라 말해 어눌했던 발음들도 교정해 나갔습니다. 이 새장 속에서 사회에 유통되기 위한 노력을 참 무던히도 했습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불시착한 이방인에게 원주민들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곳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나의 색을 포기하고 그들의 색을 따라 했습니다. 말투, 사고, 취미, 공감대… 비로소 그들과 같아 보일 수 있었지만 다른 색으로 덧 칠 되어가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혐오감이 들었습니다. 타인이라는 지옥에서 고문 받은 죄수에게 남은 건 몸에 가로 새겨진 고독 한 줄과 깎여 나간 자존감,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옥죄어오는 두통이었습니다.

 

이제는 감쪽같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나 봅니다. 기억나나요? 당신은 나에게 계산적이라 했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합니다. 아무렴! 나는 모든 일이 내 상정 범위 내에서 일어났으면 해요. 당신이 나를 보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줄 거란 것, 이 대목에서 당신은 분명 웃을 거란 것, 이쯤에서 당신이 작별을 고할 거란 것까지 전부 관찰을 통해 학습한 것이죠.

 

지금도 고막을 찢는 이 소리가 건물에서 울리는 경보인지, 내 보청기에서 나는 파열음인지, 내 귓속에서만 물결치는 이명인지 눈치를 보며 두려움에 떨기 싫어요. 방금 호명된 것이 내 이름인지 윤곽이 비슷한 타인의 이름인지 명확히 알고 싶어요. 평정심을 위협하고 자존감을 움츠러들게 하는 변수는 더 이상 없었으면 해요.

 

술이 정말이지 좋습니다. 누군가는 도피라 말했지만 나에겐 안식이었습니다. 술에 의존하면 두통으로 일그러진 광증도 누그러지며 혼란한 내면을 관조해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후 밀려오는 숙취도 오롯이 내 소유의 고통이고 감각이기에 좋았습니다. 그래도 술보다는 역시 당신이 좋습니다. 대화를 할 때 언제나 입을 보여주고 보청기가 있는 쪽으로 서 함께 걸어주고 뒤에서 무언가 오면 몸을 잡아 끌어주는 당신이 좋습니다.

 

왼 눈에 내리 앉은 어둠과 대단원의 막이 임박한 귀는 종영을 종용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막막함에 헛구역질이 계속해 나옵니다. 언젠가 모든 감각이 사라져 상실감이 공허한 몸을 가득 채운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땐 이미 당신과의 유대감에 잠겨 가라앉고 난 다음일 터이니.

 

걱정마요 그대.

 

난 괜찮아요.

 

이주형 작가님의 '표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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