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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육상연맹 금메달 리스트 정봉순, 왜 메달을 박탈했을까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9.2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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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KTV 대한늬우스 유튜브(바로가기)

1979년 5월(31일~6월3일)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정봉순 선수가 여자 400m와 800m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 체면치레를 했다.

그러나 제3회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기록을 보면, 한국의 금메달 2개는 지워져 있다. 아시아육상경기연맹이 금메달을 딴 정봉순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판명돼서 금메달 2개 기록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인 것일까?

1979년 당시 정봉순은 광주여상 3학년이었지만 여자라기에는 너무 거칠게 생겨 겉모습은 오히려 남자 쪽에 가까웠다.

정봉순은 얼굴 양쪽 광대뼈가 툭 불거진 데다 피부색도 거무튀튀했다. 가슴도 지나치게 빈약해 보였고 엉덩이는 남자처럼 위로 올라붙었다.

1m75cm 65kg의 체격조건이지만, 상체에 비해 다리의 길이가 웬만한 남자보다 길었고, 목이 남자처럼 굵고 남성의 상징인 복숭아 뼈도 보였다. 그리고 달리는 모습도 남자처럼 보폭이 넓었고 매우 힘이 넘쳤다.

특히 라스트 스퍼트가 일품이어서 5~6m 쯤 떨어져 있다가도 막판 스퍼트에서 거뜬하게 앞서가는 선수를 따라 잡았다.

그런데 더욱 아리송한 것은 목소리 색깔 즉 음색이었다. 어찌 들으면 남자가 애써 여자 목소리를 내려는 것 같았고, 어찌 보면 본래 여성인데 자라온 환경 때문에 남성화 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정봉순은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40여일 앞두고 있었던 한국대표 선발전(1979년 4월14~15일)에서 이상한 행동을 했다.

4월14일 벌어진 여자 400m 예선에서 55초7의 한국타이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정봉순은 골라인을 20여m 앞두고 스피드를 뚝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마치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결승전 후반에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스피드를 떨어트린 것과 비슷했다. 우사인 볼트는 자신이 금메달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페이스를 떨어트렸지만......

정봉순이 페이스를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 육상 관계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봉순이가 페이스를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는 것은 물론 54초대도 가능 했었어”

“굉장한 선수야, 아시아선수권대회 까지 염두에 두고 레이스를 한 것 같아.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전력을 숨기려는 것 같았어”

당시 육상 국가대표 원종세 코치(건국대 코치)는 “유연성이 너무 없다. 달리는 폼을 좀 더 부드럽게 하고, 페이스 조절만 잘 하면 지금보다 2초 이상 단축도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정봉순의 몸이 빳빳하다는 분석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정확했다.

정봉순은 다음날 벌어진 여자 800m에서는 전력질주를 한 끝에 2분08초4를 기록, 종전 한국 신기록 2분10초09를 무려 2초5나 단축했다. 거리상으로 약 18m 정도를 앞당긴 엄청난 기록이었다.

그런데 정봉순은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도 골라인을 통과한 다른 선수들이 픽 픽 쓰러지는 것과는 달리 여유 있는 모습으로 정리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도쿄에서 벌어진 제3회 아시아육상 선수권대회는 결과적으로 개최국 일본과 한국의 정봉순을 위한 대회였다.

일본은 무려 28개의 금메달을 차지해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중공이 금메달 7개로 2위, 필드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라크가 금메달 3개로 3위 그리고 한국은 정봉순의 금메달 2개로 4위에 올랐다.

정봉순은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북한이 유일하게 맞붙은 여자 8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자 800m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여자 800m를 석권한 인도의 게타 주치가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고, 북한의 장영애가 게타 주치를 위협할 만한 유일한 선수로 예상되었었다.

레이스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게타 주치가 선두로 나섰고 정봉순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러나 게타 주치가 주로 반칙(800m는 120m 지점까지는 세퍼레이트 코스 즉 자기 코스를 지켜야 한다)을 범했다. 마치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여자 800m에서 인도의 쿠리신칼 선수가 1위로 들어왔지만 주로 반칙을 범해 실격이 되고 2위로 들어온 임춘애가 행운의 금메달을 차지해 3관왕(1500m, 3000m와 함께)을 차지한 것과 비슷했다.

정봉순은 2분06초01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2위로 들어온 북한의 장영애는 정봉순 보다 무려 4초 이상 뒤진 2분10초02로 은메달에 그쳤다. 정봉순은 자신이 기록한 2분08초04의 한국 신기록을 한 달 반 만에 무려 2초03이나 단축한 것이다.

정봉순을 제외하고는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의 다른 선수들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자 100m의 모명희는 12초01로 동메달, 남자높이뛰기 김용기는 2m10cm를 넘어 4위, 여자멀리뛰기 이정연은 5m73cm를 뛰어 5위, 남자 200m의 서말구는 21초49로 5위에 머물렀다.

대회 마지막 날 까지 한국은 정봉순이 800m에서 따낸 금메달로 6,7위권을 맴돌고 있었다.

대회 최종일 여자 200m에 출전한 모명희가 24초49로 은메달을 땄고, 남자 100m 서말구는 10초75의 기록으로 태국의 수차르트(10초63)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그밖에 백옥자(여자 투포환 4위) 박원근(남자 10,000m 6위) 등 거의 모든 선수들이 메달 권 밖으로 처졌다.

그러나 북한은 김옥선이 여자 1500m에 이어 3000m에서도 9분24초09로 금메달을 획득해서 2관왕에 오르면서 종합순위에서 한국을 앞질렀다.

이제 한국은 정봉순이 남아있는 여자 400m에서 금메달을 따야지만 북한에 은메달에 앞서 종합 순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 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냉전시대여서 스포츠의 각 분야 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여자 400m는 중거리가 강한 인도의 리타 센이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리타 센의 최고기록은 53초 대로 정봉순이 갖고 있는 한국 신기록 55초대보다 무려 2초 이상 앞섰다.

출발은 리타 센이 앞섰다. 정봉순은 리타 센의 뒤를 바짝 붙어서 달렸다.

중간 지점인 200m를 통과할 때 까지도 리타 센이 정봉순을 약 2m 가량 앞섰다. 300m 지점을 통과 홈 스트레이치에 접어들었을 때 까지도 리타 센이 정봉순을 1m 정도 앞에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380m 지점, 그리니까 골라인을 20m 정도 남겨 놓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봉순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무섭게 스피드를 내면서 리타 센을 앞서기 시작하더니 54초53의 한국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눈앞에서 금메달을 놓친 리타 센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정봉순, 남자로 전환

그러나 정봉순은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끝으로 한국 육상 계에서 사라졌다.

정봉순은 성 정체성 논란을 빚은 후 2년 후인 1981년에 완전한 남자로 전환했다.

아시아육상경기연맹은 정봉순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따낸 금메달 2개를 취소 시켰다.

그 후 정봉순 씨는 전라남도 나주에서 김홍미 씨와 결혼해서 슬하에 1남1녀를 낳았다.

그렇다면 태릉선수촌에서 정봉순과 함께 훈련을 했던 선수와 임원들은 정봉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당시 정봉순을 지도했던 원종세 코치는 “여성도 그렇다고 남성도 아니었다. 다만 여자라기에는 너무 억센 편 이었다”며 “하루는 기록이 좋아서 업어 준 적이 있는데 마치 남자를 업은 것처럼 뻣뻣했다. 그래서 시골 출신이라 억센가라고 생각했었다”며 회고했다.

동료 선수 였던 장재근 씨는 “함께 훈련을 하면서 남자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남자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정봉순은 전라남도 나주군 세기면 송제리 화동부락에서 정동일 씨와 한근백 씨의 3남4녀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발달해 육상을 하기 전에는 광주여상에서 배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광주여상에서 배구를 할 때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샤워를 하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고 한다. 팀 동료 선수들은 몸에 큰 상처가 있어서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여겨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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