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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이주형 전문 기자
  • 입력 2020.09.07 21:28
  • 수정 2020.09.0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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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좀 걸을까?”

시끌시끌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는 펜션의 조용한 방구석 한 켠 함께 있던 그녀에게 고심 끝 멘트를 던졌다.

동기들과 함께 가는 대학교 첫 MT. 동기 단톡방 속 과대의 인원 조사 투표에서 어렵기만 한 선배들이 안 따라온다는 말에 흔쾌히 참가표를 던졌다. 청각 장애로 인해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어려워 학과 모임 및 행사에도 일절 불참했던 나였지만 그래도 내심 동기들과 친해지고 싶은 터에 잘됐다 생각했다. 동기 MT의 목적지는 가평. MT 선발대에 합류한 나를 반겨준 것은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혀지는 소주 한 궤짝이었다.

노선은 짧았지만 역 간 거리는 긴 경춘선을 타고 일행과 가평에 내렸다. 도보 끝에 도착한 펜 션. 짐을 풀고 숨을 돌리자 생각도 못한 난관을 발견했다. 어색하다. 다른 동기들끼린 이미 서 로 꽤 친해진 상태라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내 역할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아있기도 뭣해 피곤하다며 등지고 누워 낮잠 자 는 척 했지만 왠지 신세가 울적하기만 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날 만큼 빨리 술 마시 기만을 기다렸던 적이 없었다.

해가 저물 무렵 드디어 후발대들도 하나 둘 도착해 전 인원이 모였다. 단체로 야외에서 가져온 고기들도 굽고 술을 마시는 시간. 나는 자청해서 고기 굽는 역을 맡았다. ‘고기 구울 줄도 모 르는 아마추어들이 굽게 할 바엔 본인이 직접 굽겠다.’ 의 취지는 아니었다. 대화에 어울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기 보단 숯불 앞에 있는 게 마음은 더 편하겠거니 싶어서였다. 숯 특유 강한 화력으로 첫 고기는 가볍게 태워주고 다음 고기를 굽고 있었다. 치이익 거리는 특유의 소 리를 들으니 기분 좋아지는 한 편 이 공간에서 내가 유일하게 인식이 가능한 소리라는 게 울적 했다. 같은 돈내고 놀러와서 추억 하나 못 쌓고 고기만 굽다 돌아가는건 아닐지 심히 불안 해지기도 했다. 그거만 굽고 교대하자는 말도 있었지만 이미 흥이 오른 자리에 중간부터 끼어 들을 자신이 안 났기에 괜찮다는 말로 응대했다.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엔 나름 성취감도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고기 굽는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시끄러운 술자리에 도 우뚝한 내 평정을 흔드는 건 단 한마디로 충분했다.

“고기 굽는 게 그렇게 재밌어?”

옆에 와서 뻔히 불판 위 고기와 나를 번갈아 보는 이 애한텐 내 나름의 모임 생존 수단인 고기 굽기가 하나의 유흥으로 여겨진 듯했다. 본인의 자리를 두고 옆에 와서 계속 말을 거는 게 부 담스럽기도 했지만 그 작은 손으로 쌈을 꾹꾹 싸서 건네주는 건 좋았다. 내가 구운 고기를 먹 는 건 처음이었는데 ‘누가 구웠는지 몰라도 잘 구웠더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나는 여자에 면역력이 없는 편이다. 정확히는 여자가 어렵 다. 여자와 교류가 있던 건 초등학생까지였고 이후는 쭉 남초였다. 그나마 동성들과는 특유의 게임, 축구 등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나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지만 여자들과는 공감 대가 없으니 대화를 시작하기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공포증까진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부담스 러웠다. 모두가 취할 때까지 도돌이표인 술 게임에서 벗어나 구석에 앉았다. 겨우 숨 돌리려는 찰나 내 옆에 와 앉아 있는 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는 도통 몰랐다.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긴장돼 괜히 숨을 쉬는 걸 의식했고 혓바닥 위치까지 신경 쓰였다. 다행히 왜 모두와 안 놀고 여기 혼자 있냐는 질문에 보청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답한 이후론 별다른 말은 따로 없었다. 그래도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나에게 호의를 보여 준 애한테까지 무관심으로 대하고 싶지 않아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시끄러운 술자리에서는 대화가 힘들 것 같아 조용히 얘기도 하고 바깥 공기도 쐴 겸 제안을 했다. 나가서 걷자고. 공기는 상쾌하고 조용하니 더 좋았다. 그 애의 이름을 정확하게 듣고, 행여나 손바닥에도 석 자를 적어달라 했다. 소음 속에서는 귀찮았을 뿐인데 고요 속에서 접하니 꽤나 달리 보였다. 좋 아하는 장르와 책이 상당수 겹쳐서인가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상대에게 푹 빠졌다. 자연스럽게 내 보청기가 있는 쪽에 서서 함께 걸어 주는 점인지 삼국지도 꿰고 있는 박식함인 지 아니면 지금도 기억나는 코를 간질이던 잔잔한 장미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은 이미 주도권이 없었고 지금 이 타이밍을 놓치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도 웃긴 게 상대 의중은 모르면서 내가 먼저 고백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대학교 면접을 볼 때도 이렇게 긴장되진 않았는데.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는 흔들리는 와중에도 말을 더듬진 않 았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문득 겁이 났다.

내가 사람을 대함에 있어 가장 비중 있게 두는 건 두 개였다. 역지사지와 함께 오해하지 말자. 오해는 무섭다. 나에겐 크더라도 상대에겐 일상적 작은 시그널일 수도 있기에 괜히 친구로도 지낼 수 있는 이 좋은 관계를 망칠까 두려웠다. 목젖에 걸쳐 앉은‘좋아해’한마디를 다시 우 겨넣으려 했다. 이 마음을 접고, 상대의 호의를 확대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생각했다. 이 밤 산책 파트너를 무사히 에스코트해 다시 돌아가자 라는 생각을 굳혔을 즘, 사단이 났다. 내 팔꿈치 안쪽으로 무언가 쏙 들어왔다. 춥다며 팔짱을 껴온 그 애는 천연덕스럽게 내 어깨에 머 리를 기대기까지 했다. 이 시그널을 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저울질을 하느라 사고는 과부하 됐다. 술기운 때문인지 용기였는지 결국 저질러버렸다.

“나, 너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지금에서야 우스갯소리로 그 애와 말할 때면 항상 거론되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순간이고 내 인생 손꼽히는 하이라이트지만 그 애는 친구와 자연스럽게 하던 스킨십이라고 했 다. 본인에게 팔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나. 나에게 왔던 거센 충격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비중 이었다. 그 덕분에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는 되었지만 뭔가 속은 기분을 지우긴 힘들었다. 나에겐 효율적인 고도의 테크닉이었는데. 확실히 여자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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