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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297] Critique: 김아름 피아노 리사이틀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0.08.2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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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2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영산아트홀 무관중 온라인 라이브 공연

올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정되어 있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8월 22일 토요일 영산아트홀로 연기된 피아니스트 김아름 독주회를 참석하기 위해 홀에 도착하니 무관중 온라인 공연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영산아트홀 같은 민간공연장이 고위험시설군에 속하는 것도 아니요 실내 인원 50인 이하라는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관객도 최소 인원으로 제한할 거라고 여겼지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전환할지는 예상치 못해 홀에 도착해서나 알았다. 입구에서 발열 체크와 철저한 소독 후에 문진표를 작성하고 평론가의 자격으로 참관 기회를 얻었다.

8월 22일 토요일 영산아트홀에서 열린 김아름 피아노 리사이틀

무관중 온라인 콘서트는 지난 5월 조성진 이후 처음이다. 그때는 서재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들었다면 이번은 연주홀에서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채 듣는다는 게 다른 점이다. 혼자 그 큰 영산아트홀을 독차지하고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니 행운이자 복이라고? 천만에! 단견이다. 먼저 피아노를 비롯한 클래식 기악 연주회 등을 광화문 집회발 코로나 감염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엄중한 시국에 개최하느냐는 우려와 비판에 대해 항변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치고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보지 못했으며 음악회 한 번도 안 갔다고 확신한다. 음악회라고 하면 노래 부르고 춤추는 형태라고 지레짐작하고 클래식 음악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비난을 위한 비난, 프로불편러에 불과하다.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상태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주 중엔 일체의 대화와 잡담이 허용되지 않는 오직 정신을 집중시키고 귀와 온몸으로 듣는 감상의 예술이 음악이다. 그러니 비말이 튀겠는가 공기로 전파되겠는가! 더군다나 공연 내내 마스크는 필수 착용이요 객석도 한 칸 띄어 앉기가 아닌 3미터 이상 떨어져 앉아 밀집, 밀접, 밀폐되어 있지도 않다.

무관중 온라인 실황공연으로 대체된 김아름 피아노 독주회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그 말인즉 정해진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해, 음악인들은 다른 여타 직업군들보다 지정된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혼신의 연주를 펼치기 위해 집중과 몰입을 한다. 10분 연주를 위해 100시간, 1000시간, 일만 시간을 넘어 평생 연습하고 학습한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사정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 부득이한 연기는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쌓아올려야 하는 고행의 반복이다. 코로나로 인해 정성스레 준비한 연주회를 눈물을 머금고 연기해야 했던 연주자의 심정을 헤아리는가! 본인의 잘못과 부주의, 연습부족도 아닌 천재지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연기했다. 단지 시간만 흐르고 바뀐 게 별로 없는 환경에서 새로운 레퍼토리도 아닌 3월 콘서트를 위해 초점을 맞추고 준비한 곡들을 다시 꺼내 스스로에게 동기부여하면서 오늘의 콘서트까지 도달한 피아니스트 김아름, 아니 우리 음악인들의 노고를 당신은 짐작이나 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관객도 없이 그 큰 무대에서 홀로 외롭게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보이지 않은 눈동자들의 주시 속에 아무 리액션과 호응 없이 혼자 연주를 해야 하는 압박감은 오죽하겠는가!그 큰 홀에 홀로 남겨지고 불 꺼진 무대의 멀리 연주자하고만 일체의 대면도 없이 음악을 들어야 하는 필자에게 습한 날씨에 튼 에어컨의 한기만 밀려왔다. 홀로 버려진 느낌의 필자인데 무대 위의 저 연주자는 얼마나 외롭고 고립감을 느끼겠는가!

무대 위의 고립과 고독

첫 곡인 모차르트 변주곡은 정갈하고 깔끔했다. 6분간의 워밍업이라 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를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간 김아름이 라벨을 위해 다시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1분여의 시간이 마치 모든 게 갑자기 멎은 듯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곡과 곡 사이의 퇴장에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라벨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에서의 2번의 멜랑코니, 3번의 유쾌함 그리고 마지막의 안개에 싸인 듯한 마치 지금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같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방향성에 이어 라우타바라의 <연습곡 op.42>에서 김아름은 숙달한 기교를 선보였다. 특히나 5번의 <2도>에서 드러나는 끈덕진 오스티나토의 암울함에 이어 6번의 <5도>에서의 쾌활함과 질풍노도는 쾌도난마 그 자체였다. 15분간의 휴식 후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8곡의 단편 모음곡이다. 곡들마다 독립적이지만 유사성과 연계성이 강하다. 두 개의 자아의 계속된 교차와 투영 속에 2번에서의 다각도, 다층적인 변화가 눈에 띄었다. 3번의 긴박함에 이은 4번에서의 안정감을 북돋아주는 절묘한 페달링과 성부에서의 힘의 안배, 4번에서 5번으로 넘어갈 때 마치 3번을 연상하는 듯한 같은 조의 으뜸음인 G의 강렬한 타격은 슈만의 피아노 모음곡들이 가진 연속성을 이어주는 내레이션이었다. 5번에서의 긴장의 이완과 수축 그리고 4번에서의 이어짐인 6번에 이은 마지막 2개의 악장, <크라이슬레리아나> 내내 이야기 전개의 효과적인 설명과 문학적 장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밑받침된 연주였다. 그리고 앙코르는 없었다.

영산아트홀 로비의 공연 안내 포스터

리사이틀이 끝나고 대기실로 가 홀로 외로운 싸움을 마친 김아름을 격려차 뜨겁게 포옹해 주고 싶었다. 필자에게도 서로 무대와 객석에서 같이 완주했다는 성취를 누리고 싶기도 했다. 순간 흠칫했다. 큰일 날뻔했다. 비대면의 악수도 하면 안 되는 판국에 포옹이라니! 그리고 허락도 안 받고 상대방에게 신체적 접촉을 하면 안 되는 시대다. 참으로 각박한 여러모로 무서운 세상이다. 뉴노멀 시대에 클래식 음악도 연주자의 정서적 안정을 충족시켜주는 상담이 앞으로 각광을 받을 거라 짐작한다. 독주회를 끝내고 참석한 손님들의 축하와 피드백을 받으며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이런 류의 음악회는 허무하고 허탈이 지금까지의 수고에 대한 보상보다 앞선 감정이기 때문이다. 험한 시국일수록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정,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게 예술이요 예술가의 역할 아닌가! 덕분에 고맙습니다. 그들도 방역의 최우선자요 감정치유사다. 그런 예술가들도 고립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많은 사랑과 관심,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우리는 조금 더 서로에게 친절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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