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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겨내기] '상미' 김수연님

mediapiawrite
  • 입력 2020.08.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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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피아 '코로나 이겨내기' 에세이 공모전 공동 3등 수상작, 김수연님의 작품 '상미'

봄다운 활기가 전혀 없는 4월이었다. 개학이 취소되어 앞으로의 생활이 애매해진 나는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마스크를 산소호흡기처럼 달고 전화를 할 때마다 말투 속에 베여있는 사투리에 사람들은 눈을 찌푸렸다. 나는 무언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느새인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적의를 느끼지 않으려 한없이 몸을 움츠렸다. 스마트폰 안에서는 ‘대구 봉쇄’ 같은 말들이 아주 쉽게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하는 수없이 창문이나 바라보자 사람들의 체취와 기차의 기름내, 겹쳐 입은 가디건에서 배어난 땀까지 속이 메슥거렸다. ‘고래성이 오늘 영업을 하려나….’ 

고래성은 동네에서 유명한 중국집으로 아주 매운 야끼우동이 인기 메뉴였다. 영업시간은 열 시에서 네 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고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싸운 날도 휴무였다. 제멋대로인 영업 방식에 혀를 차며 돌아선 손님들도 많았지만 끊기지 않는 단골 덕분에 망할 일도 없는 가게였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26살이 된 오빠를 가졌을 때부터 외식이라고 하면 ‘고래성’을 찾는 단골 중 단골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건물에 영업을 하던 고래성은 번듯한 가게로 성장했고 할아버지가 지으신 낡은 한옥에 살던 우리 가족도 같은 동네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고래성 가족의 옆집이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매일 아침 고래성 주인 내외께서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 삼 남매는 자랐다. 

등굣길마다 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저씨께 우리 남매는 늘 인사를 했다. 좁은 동네에서 큰소리 낸 것이 면구하셨는지 멋쩍게 웃으시던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용돈을 쥐여주시기도 했다. 푸념처럼 다 키운 자식을 보니 이맘때가 가장 예쁘더라는 말과 함께 동생의 볼을 꼬집기도 했다. 이따금 아저씨는 동네를 쏘다니는 동생이나 나를 불러다가 밥을 비벼 먹으라며 짜장이나 짬뽕을 손에 들려줬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에는 아저씨가 쥐여주는 봉지에 반찬이 들어있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랩에 꼼꼼히 싸인 반찬과 짜장이, 어머니가 떠난 후에 어지럽던 마음에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계기가 되어 아저씨를 피해 다녔다.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날 때까지 나는 고래성에 가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도착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회사 일로 바쁜 아버지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말수가 줄어든 남동생은 다들 각자 일로 바빴다. 평일에 내려왔으니 마중은 바라지 않았지만 텅 빈 집을 마주하는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던 전화를 끊으려 하자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동생이 코로나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검사를 받으러 갔다는 이야기였다. 택시 안에서 마주한 동네가 어수선했던 이유는 사방에 퍼진 확진자로 큰 마트나 편의점이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열려있던 가게에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때아닌 지옥도였다. 

메슥거리는 속에 뭐라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집 안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먹다 남긴 배달 음식에 말라 비틀어진 채소, 정체불명의 검은 봉지까지, 남자 둘이 사는 집에 무엇을 바라겠냐며 나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음식 정도를 못 구하겠냐는 호기로움은 아무리 걸어도 사람 한 명 없는 공원과 거리를 보며 점점 절망으로 변해갔다. 가벼워지고 있는 위장과는 달리 무거워지기만 하던 걸음은 어느 틈엔가 고래성 앞을 지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가게에 불이 꺼져있었다.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가게 앞에 놓인 대기 의자에 앉은 조그만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크기인지라 나는 무엇인지 확인 차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곧 고꾸라질 듯 반쯤 접힌 사람이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사람은 뜻밖에도 고래성 주인아저씨였고 술 냄새가 진동하는 상태였다. 나는 얼떨결에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시더니 손을 잡아끌어 곁에 앉혔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상미야, 세상이 이래 부질없다. 상미야, 상미야, 내가 고마 그 몹쓸 병 걸려서 콱 죽으면 좋을낀데, 상미야. 상미야….”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아저씨를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곳곳이 위험한 도시에서 아저씨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일말의 책임감이었다. 혹은 상미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아저씨의 말에 어린 물기를 알아차려서 일지도 몰랐다. 간신히 부축한 아저씨를 모시고 가는 와중에도 아저씨는 내 손을 꼭 잡고 상미라는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래로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나는 내 이름도 아닌 말들을 가만히 새겨들었다. 후에 듣게 된, 상미가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딸이라는 말과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던 아저씨의 손이 자꾸만 떠올랐다. 

동생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리 가족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군청에서 나눠준 인스턴트 식품을 끼니마다 데워먹었고 어색한 대화가 뚝뚝 끊기다가 마침내 조용해지는 순간에는 약속한 듯이 텔레비전만을 쳐다봤다. 그렇게 하는 일 없이 하루가 가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택배도 배달이 되지 않는 곳에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문을 열어봤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알새우가 면보다 가득한 야끼우동이 김을 내며 신문지에 덮여 있었다. 고래성의 야끼우동이었다. 그날 이후로 고래성 아저씨는 늘 집 앞에 야끼우동을 두고 갔다. 설마 하는 마음에 찾아가 본 가게에는 코로나로 인한 영업 중지문이 붙여져 있었다. 나가지 못하는 우리 가족에게 줄 한 그릇을 만들고자 가게 주방을 여는 일이었다. 식지 않도록 꼼꼼하게 랩을 싼 야끼우동은 우리의 끼니를 걱정해주던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2주 동안 속이 아릴 정도로 매운 그것을 갇혀있어야 하는 답답한 공기와 경직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면서 먹었다. 옆집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아저씨의 딸 상미를 생각하며 쉼 없이 씹었다.  

동생은 다행히 음성으로 결과가 나왔다. 대구를 휩쓸 듯이 늘어나던 감염률은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요일을 확인해가며 사놨던 마스크 몇 장과 야끼우동이 담겨있던 접시 그리고 편지를 가지고 고래성으로 향했다. 영업을 재개한 고래성에 드문드문 사람이 있었다. 나를 본 주인아주머니가 아저씨를 불렀다. 웍을 돌리느라 얼굴이 상기된 아저씨가 주발을 걷으며 나왔다. 

“서울 올라가나?”

매일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음에도 멋쩍은 듯 아저씨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 뒤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반찬이랑 짜장 잘 먹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지 못한 말까지 더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며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키운 모든 마음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맑았다. 사람이 없는 거리에 꽃잎 대신 무성한 풀잎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허공에다가 상미, 하고 발음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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