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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55 ] 이방인

김홍성
  • 입력 2020.08.1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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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를 가지면서부터는 혼자 놀 때가 많았습니다. 아니 바가지와 같이 놀았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책상 위에 바가지를 놓고 앉아서 ‘이방인(異邦人)’으로 번역된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김홍성

 

원효 대사 아시죠? 물론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저는 그 때 원효 스님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주워들은 짧은 얘기만 기억하고 있었죠. ,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떠났다, 움막에서 자게 된 어느 날 밤 자다가 깨서 물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중에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이 때 크게 깨달은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 가지 않았다. 겨우 이게 전부였죠.

 

그 얘기를 듣고 ,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던 자가 마침내 그럴듯한 해골바가지를 얻었으니 어찌 흉내를 내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학병원 창고 옆에서 얻은 바가지를 머리맡에 자리끼로 놓고 잤습니다. 자다가 깨서 바가지의 물을 마셨습니다. 아침에 깨서 빈 바가지를 봤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안 오는 겁니다. 머릿속이 환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자다가 깬 그 멍한 상태 그대로였죠.

 

하다하다 안 되니 바가지에 소주를 부어 단숨에 마셔봤습니다. 금방 소식이 오더군요. 우선 뱃속이 찌릿찌릿했고, 좀 있다가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고, 나중에는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습니다. 돌대가리들이 하는 짓은 대충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반, 3학년 1반은 예비고사반이라고 해서 성적이 극히 불량한 학생들만 모아 놓은 반이었습니다. 돌반 아이들은 원래 60 명 쯤 되는데 점심시간이 지나면 교실에 30 명 정도만 남아요. 나머지는 모두 학교 담을 넘어서 밖으로 나간 겁니다. 당구장에도 가고, 종로의 빵집에서 타교 아이들과 패싸움도 하고, 멀리 경복궁에 가서 여학생들과 노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같이 어울렸지만 늘 시들했습니다.

 

바가지를 가지면서부터는 혼자 놀 때가 많았습니다. 아니 바가지와 같이 놀았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책상 위에 바가지를 놓고 앉아서 이방인(異邦人)’으로 번역된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 아버지냐, 어머니냐, 또는 누이냐, 아우냐?

-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아우도 없다.

- 친구들은?

- 당신이 지금 한 말은 오늘날까지 그 뜻조차 모른다.

- 조국은?

- 그게 어느 위도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나는 몰라.

- 미인은?

- 그것이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지만.

- 돈은?

- 당신이 하느님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한다.

- 그래! 그럼 너는 대관절 무얼 사랑하느냐, 괴상한 이방인아?

-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에......저기에...... 저 신기한 구름을!

 

결국 외삼촌에게 바가지를 압수당했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큰 병원에 갔습니다. 많은 검사를 했어요. 담당 의사는 노이로제가 심하니 한적한 곳에서 쉬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 줍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진단서의 기록은 불명열(不明熱)’ 뿐입니다. 알 수 없는 열이 있다는 뜻이죠. 제 체온은 정상적인 체온보다 높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제 이마는 늘 뜨끈뜨끈했어요.

 

그 의사 덕분에 저는 휴학계를 내고 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사는 시골에서 30리 떨어진 바위산 기슭에 있는 절, 고시생들이 하숙을 하는 절이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부인과 자식이 있는 분이기는 했지만 일찍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분이셨습니다. 스님은 저에게 참선을 가르쳐 주려고 애쓰셨지만 저는 가부좌(跏趺坐)가 너무 어려웠어요. 저는 참선보다 바위에 올라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게 좋았어요. 먼 산을 바라보고, 먼 산 위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게 좋았어요.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엿가위나 바가지가 저를 결국 절에 가게 해 줬구나 싶습니다. 승려가 아니라 일종의 하숙생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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