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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8 ] 소나기

김홍성
  • 입력 2020.08.1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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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쪽 귀퉁이만 둥글게 터져 있었는데, 세상의 빛이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꿈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 구멍을 통해 사라지는 듯 했다.

ⓒ김홍성

 

새벽인 줄 알았는데 저녁이었다. 두 시간 동안 깊은 잠 속에 빠져 수많은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는 혼미한 꿈을 꾸었다. 시간 감각을 놓쳤더니 공간 감각에도 혼란이 왔다. 내가 처한 곳이 알리멘트라는 걸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리멘트의 식당에서 비망록을 덮고 방으로 올라왔다는 걸 기억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탁 터진 하늘을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에서 빠져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쪽 귀퉁이만 둥글게 터져 있었는데, 세상의 빛이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꿈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 구멍을 통해 사라지는 듯 했다. 검은 구름이 움직여서 그 구멍을 완전히 메워버리기까지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꿈에서 만난 몽중 인연들을 꿈 깨서 더듬자니 전생 인연처럼 종적이 묘연했다.

 

옥상 방에 불이 켜졌다. 잠시 후 스님이 나왔다. 스님이 나온 후에야 그 방이 스님 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전에는 내가 썼던 방이라는 기억도 돌아왔다.

 

좀 잤더니 개운하네요.”

저도 좀 잤어요. 다섯 시 밖에 안 됐는데 한밤중 같습니다. 구름이 솥뚜껑 같아요.”

비가 올라나?”

비 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목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양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내밀었더니 또 빗방울이 떨어졌다. 제법 무게가 느껴지는 굵은 빗방울이었다. 스님도 나처럼 손바닥을 내밀고 있다가 소나기 한 번 멋지게 쏟아지겠네요.’ 했다.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여기서 비 구경 하실래요? 내려가서 차 마실래요?”

비 구경이 좋겠죠. 차는 제가 내려가서 가져 오겠습니다. 곡차는 어떠세요?”

비 구경하면서는 곡차가 좋겠죠. 저는 맥주 한 병이면 족해요.”

알겠습니다.”

 

막 내려가려던 참인데 번개가 번쩍하더니 먼데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마 밑에 서서 구경할 비가 아니었다. 스님은 자리를 옮기자고 하더니 방에 들어가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했던가? ‘아쉬운 대로 이걸 깔고 앉으세요.’ 하면서 등산용 매트리스를 펼쳤던가? 아무튼 우리는 방 안에 들어앉아서 기세 좋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제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상념은 무엇이었는지 잊었다. 아마 과거에 겪은 비슷한 상황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도 잊었다. 적막이 갑갑했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겠지만 그건 잊었고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 아세요?”

처음이지만 이미 본 느낌 아닙니까?”

, 맞아요.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느낌, 그렇다고 환각이나 착각은 아니고 ....... 인도 땅에 온 후로 그런 느낌이 가끔 듭니다. "

 

스님은 자칫 넘칠지도 모르는 술잔을 건네는 듯 느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리아 호텔에서도 그랬습니다. 그 때도 옥상이었죠. 많이 취하지는 않았는데 기시감이 너무 강렬해서 몸이 떨렸어요. 어떤 장면들이 그랬는지는 제대로 표현이 안 됩니다. 그 느낌은 한 순간에 왔다가 사라집니다. 간신히 꼬리를 잡고 따라가 보기는 하지만 결국 놓치고 맙니다. 방금 그랬어요. 흐흐흐 .......”


어떤 고정된 장면이 아니라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상황의 한 토막을 과거에 이미 겪었다는 느낌이겠군요. 저도 가끔 그런 걸 느끼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자리 좀 바꿔 앉자고 그래요. 바꿔 앉습니다. 그 사람이 창문을 조금 엽니다. 그 순간에 느낍니다. , 지금과 똑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다고요. 맞습니까?”

비슷해요.”

버스는 계속 달리고, 그 사람은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습니다. 속눈썹이 바람에 떨고 있습니다. 그 장면은 과거에 이미 본 장면이 아닙니다. 기시감이 사라진 거죠. 그래서 과거에는 어떻게 전개됐었는지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비슷한가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 어려운 애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

하하하, 내려가서 맥주 가져 올게요.”

아니 그만 두세요. 그냥 좀 이렇게 앉아 있고 싶습니다.”

혼자 말입니까?”

, 미안해요.”

밑에 식당에 있을 게요. 마음이 변하면 내려오세요.”

“......”

 

비 쏟아지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빗방울이 튀어서 문턱을 넘어 오고 있었다. 때맞춰 천둥 번개가 쳤다. 번쩍하더니 우르르 쾅, 또 번쩍 하더니 우르르 쾅쾅. 전쟁이 난 듯 했다. 스님의 얼굴에 번갯불이 비쳤다. 그 순간에 본 스님은 눈을 감고 있었다.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누가 저런 얼굴이었을까?
 

식당에서 맥주 한 병을 비웠을 때 비가 그쳤고, 두 병을 비웠을 때 스님이 내려왔다. 스님은 어느새 밝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뚱바라고 했던가요? 그거 한 번 마셔보고 싶은데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왜 안 되겠습니까. 가십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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