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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일본군 관사'... 균형

안성호 전문 기자
  • 입력 2020.08.10 22:33
  • 수정 2020.08.1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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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일본군 관사' 복원과 삼전도비, 그리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상암동으로 출근한지 한달 쯤 지나고 보니 퇴근길이 지겨워진다.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편안하게 앉아서 갈 수 있게 회사 바로 앞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오늘은 새로움을 느껴보고 싶은 날. 낯선 길 내리는 곳 놓치지 않으려고 지도앱을 보다가 우연히 '일본군 관사'라 써 있는 곳을 봤다. 맞은편 어딘가에 있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답사지를 보게 돼서 기분 좋았고, 이 땅에서 '일본군 관사'라는 유적이 가지는 의미를 어떻게 녹여 냈는지 궁금했다.

앱을 보니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이라, 퇴근시간에 걸어가 보기로 했다. 공원을 지나 외국인 학교 앞 대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다보니 대로변에 작은 샛길이 나왔고 그 앞에는 공원으로 가는 입구가 있었다. 그 왼편에 나무로 만든 집이 보였다.

 

공원안에 있는 걸로 봐서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같이 복원되었던 것 같았다.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임시휴관"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안내표지판과 몇가지 안내문이 있긴 했으나 유심히 보지 않으면 공원 내에 있는 시설이라 여겨질 건물이었다. 사진을 찍고 잠시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군 관사가 있는 공원 앞                     일본군 관사 (앞 건물)

 

그냥 동네 한바퀴 돌다가 공원에 만들어진 나무집을 바라본 정도였다. 아마 그 동네 살았다면 무심코 지나치는 곳일 뿐, 눈에 띄거나 딱히 거슬릴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왔을 때. 그 때는 마음이 먹먹했다. 독립투쟁하시던 분들을 이 땅과 격리시키고 고문하기 위해 만든 시설. 그 안에서 본 내용들은 충격적이었다. 일제가 행한 만행이 어느 정도 였을지 느껴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그걸 증명하듯 일제시대에 있었던 시설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처절했던 기억을 기록남겼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의 아픔을 녹여내어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수치스럽고 아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유적을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그 곳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바뀌었고 많은 이들이 찾아와 그 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곳에 기록으로 남겨진 항일투쟁가들을 추념하고 있다.

 

공원안에 있는 '일본군 관사'는 있는 듯 없는 듯 했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체험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테마 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비주얼 씽킹,… 암호를 풀어라...".

마포구청 홈페이지에는

- 나도 독립운동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암호체계 ‘순전암호변용법’을 이용한 미션 수행

- 독립군 옷을 입고 체험하는 독립운동가

라는 체험을 진행한다고 했다. 왜 굳이 이곳에서 이런 체험을 할까? 건물 내부는 보지 못했으나, 기사로 찾아본 '일본군 관사'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일본군 만행을 알리는 내용은 볼 수 없었다. 외부에는 건물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이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복원한 건물일텐데, 이런 건물이 주변에 있다면 주민들이 좋아했을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처럼 역사적 의미를 녹여낸 흔적도 없는 이런 건물을 복원한 의도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일본군 관사'는 주변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당시 SH 공사에서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의뢰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공청회나 전문가 의견 수집과정은 없었고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SH공사와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일본군 관사'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문화재위원회 제3차 회의록 (2012.6.7)'에 '일본인 관사' 문화재 등록에 대해 눈에 띄는 기록이 있었다.

언론제기 사항

ㅇ 네거티브 문화재 등록추진에 대한 국민적 반감

   - 역사적, 교육적 활용 가치 등을 검토하여 등록문화재로 등록 필요

복원공사비를 아파트분양가에 산정 입주민들 집단 소송 준비

일본군 관사 앞에 일본인 학교 위치 문제

   - 관사 이축 위치(기존 위치와 인접)는 ’07.7월에 결정(우리청)

   - 일본인 학교 이전(개포동→상암동)은 ’08.3월에 결정(서울시)

ㅇ 약 9억원 들여 복원한 일본군 관사 방치(등록문화재 등록 및 관리 소홀)

   - SH공사에서 서울시 마포구로 소유권 이전 중으로 활용예산 미 책정

'일본군 관사'라는 혐오시설에 대한 반발 이외에 눈여겨볼 2가지가 더 있다.

"SH 공사를 상대로 입주민들이 복원공사비 반환청구 소송 준비"

SH 공사가 복원 비용을 아파트 분양가에 포함시켜 공사를 진행했고, 주민들은 문화재를 등록하는 시점에 알게 되어 소송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서 제기한 사항이 맞다면 입주민들이 원하지 않는 문화재 복원 공사비를 입주민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일본인 학교가 '일본군 관사' 앞 도로 맞은편 이전"

문화재청이 '일본군 관사' 이전 위치 결정을 하고 한달 뒤에 서울시가 일본인 학교를 지금 위치로 이전 하도록 결정을 했다. 결정 과정을 보면 어떤 의도를 반영해 신속하고 깔끔하게 결정되었다는 의혹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일본군 관사'와 일본인 학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심의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일본군 관사' 문화재 등록은 부결되었다. 성급한 판단으로 구성원들 동의 없이 무리하게 추진한 복원사업은 문화재 등록하는 과정에서 좌절되었고, 구민 여론을 의식한 마포구가 기부채납을 반대했다. 그 후 '일본군 관사'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최근에 마포구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관사'처럼 우리에게 수치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 중에 아주 오래된 것이 있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세운 "대청황제 공덕비". 우리에게는 '삼전도비'로 알려진 비석이다. 만주어, 몽골어, 한자로 쓰여진 이 비석은 조선으로서는 치욕스런 물건이었다. 그래서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한 이후 주민들이 강물에 수장시켜 버렸는데,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다. 광복 후에 다시 이 비석을 어딘가에 파묻었는데, 홍수로 드러났고, 이를 군부 독재자가 석촌동에 옯겼다. 2007년에는 스프레이로 삼전도비에 "철거" 등의 글자를 써서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비석을 세우고 보존하려는 이들과 훼손하고 없애려는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마음으로 보존하려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훼손하려고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일본군 관사'는 삼전도비처럼 우리에게 치욕적인 역사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생겨난 유물들이 가지는 가치와 삼전도비나 '일본군 관사'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이 두 유물에는 우리의 치욕과 한을 담고 있다. 이 유물에서 그 때 겪었던 치욕과 한을 풀어 내고 쓰라린 감정을 떼어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에게 지난 일을 잊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유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복원 및 보존할 가치가 생기고 이 땅에서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낸 유물과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처럼 '일본군 관사' 복원 과정에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 있었을까? 우리 돈을 들여 이 땅에 복원한 유적이 '일제 잔재'가 되어 일본에 열려있는 '일본군 관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삶보다는 '삼전도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담아내지 못한 유적을 복원하는데 든 비용과 향후 보존할 비용은 고스란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떠안겨지게 되었다.

몸은 독립했으나, 마음은 독립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씁쓸한 답사였다.

 

지난 해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홍성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 답사를 준비하기

위해 들렀던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을 지나다 뒤를 돌아봤다. 인왕산 위로

펼쳐진 하늘에 고운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던 분들이

생애 마지막 순간, 아름답게 펼쳐진 하늘을 보고 이 자리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 놓았을까. 애끓는 통곡을 묵묵히 들어주고 마지막 한이 고스란히 담긴 눈물로 자란 미루나무는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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