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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내고 비워낸 여행 끝에 얻은 ‘나’라는 선물!

조연주 여행작가
  • 입력 2020.08.07 08:34
  • 수정 2020.08.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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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
조금의 여백만으로 한층 더 아름다운 삶
비우기는 다시 채우기 위한 과정

 

제주도
제주도

 

제주는 어느 곳의 풍경을 보더라도 한 폭의 수채화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해변은 물론이고, 평온한 제주 마을 골목길도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제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눈과 마음에 수없이 담고도 아쉬운 마음에 그림으로 직접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배워 본적도 없고 소질도 없어서 급한 대로 수채화 원데이 클래스 수업을 신청했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곤 한 번도 붓을 잡아보지 않았으니 완전 초보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색을 덜어내고 조절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최대한 힘을 빼고 여러 번 나누어서 칠하는데 내 그림에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수채화는 물감의 농담으로 화면을 채우기도 하고 적절히 비우기도 한다. 채우는 건 어떻게든 하겠는데 비우기가 힘들었다.

반대로 유화는 여러 차례 물감을 덧바르며 작품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담백한 수채화보다 중후한 맛이 느껴지는 유화를 높이 평가한다. 수채화를 유화보다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나처럼 수채화의 분위기에 반해 배우러 왔다가 어려워서 유화를 그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마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 높지 않게 쌓으면서 돌과 돌 사이를 무언가로 채우지 않는다. 그 틈으로 바람이 지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정성들여 쌓은 돌담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처럼 어쩌면 사람도 약간의 빈틈이 있어야 한다. 사람간의 사이에도 바람이 드나들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너무 기대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삶, 그 적당한 선에서 서로에게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삶, 조금의 여백만으로 한층 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다.

 

제주 돌담
제주 돌담

 

적절한 비우기가 안 되어 고생한 적이 있다. 한때 나는 옷이 너무 많아 무슨 옷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진 게 너무 많았다. 그렇게 많이 가져도 행복하지 않았다. 늘 부족하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소유하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닌데 꾸역꾸역 끌어안고 사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다못해 쓰레기통도 너무 많아 버리고 싶다. 버리고 비울수록 남은 것들이 더욱 소중해진다. 중요한 것은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인데 너무 모르고 살았다. 우리 인생도 덜어내고 단순하게 만들수록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제주를 다니며 무언가를 꼭 남겨야 하는 여행보다는 덜어내는 여행을 하려고 했다. 내 안의 욕심을 덜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제주로 떠날 때마다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짐으로 가득 채웠던 가방부터 비우기 시작했다. 산책에 방해만 되고, 짐은 짐이 될 뿐이었다.

 

제주 마을길
제주 마을길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사진 찍는 여행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들의 삶이 녹아든 골목을 자주 서성였다. 꼬불꼬불한 길에서 삶의 향기를 맡았다. 과거의 추억과 숨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이 마을의 골목길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마을, 길이 곧 그림이 되어 감각이 열리고 흠뻑 취하게 되는 곳을 대부분 혼자 걸었다. 시간에 쫓겨 다니는 급한 관광지 여행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이곳에 올 것이기에 하나씩 천천히 보고 싶었다. 그렇게 수채화 같은 제주의 풍경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비우면서 여백이 드러나는 수채화처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욕심을 비운 자리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비우기는 다시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한 삶을 살다보니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휴식조차 모르고 지냈다. 그저 하나라도 더 손에 쥐려고만 했다.

제주의 해변과 숲길, 마을길을 걸으며 건강은 채우고 마음과 정신은 비워내자 나를 들여다 볼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된 나와의 대화로 인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제주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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