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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5 ] 귀

김홍성
  • 입력 2020.08.07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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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수행을 했는지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다. 계속 하라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태도로 귀를 열고 내 앞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김홍성 

 

듣는 사람이 잘 들어 주기만 해도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샘물처럼 저절로 흘러나온다. 구태여 과장할 필요도 없고, 없는 말을 꾸며낼 필요도 없다. 그냥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면 된다. 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수행을 했는지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다. 계속 하라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태도로 귀를 열고 내 앞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까말라 얘기를 하고, 까말라가 입은 싸리나무 꽃 같은 스웨터 얘기를 하고, 싸리나무 꽃 같은 스웨터 때문에 어린 시절과 어머니가 떠올랐다는 얘기를 하고, 그런 스웨터를 떠 주었다는 여행자가 누군지 궁금했다는 얘기를 하고, 붉은 술에 취해서 펨 도마의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자니 딸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주절거린 거짓말도 세세히 옮겼다.

 

길에서 본 안개 속 보리수 얘기를 하고, 림빅의 디키 도마가 그 여행자에게 나니 디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얘기도 하고, 디키 도마의 오빠 애기도 하고, 나니 디디는 시킴의 욕숨에 있는 곰파에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트레킹 하면서 지나온 모든 마을을 며칠 간격으로 뒤따라 온 한국인 커플을 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는데 그들이 나를 페마네 뚱바집으로 안내했다는 얘기도 했다.

 

뚱바집 페마는 디키 도마의 언니이며 펨 도마도 친척이더라는 얘기도 했다. 한국인 커플, 그러니까 취생과 몽사는 펨 도마로부터 실종된 딸을 찾는 한국인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그 아버지가 바로 나라는 것과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 챘지만 내색을 안 한 채 시킴으로 떠났다는 얘기까지 다 했다.

 

그러는 동안 술병들은 모조리 빈 병이 되었다. 더 마시고 싶었고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자정이 가까웠다. 알리멘트의 식당 홀에 남은 객은 우리 둘 뿐이었다. 타파가 와서 소등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간 후 스님이 말했다.

 

얘기를 참 잘 하세요. 듣는 내내 영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내일 시킴으로 떠난다고 하셨는데 ……. 저도 가보고 싶네요. 트레킹은 별 생각 없고, 그냥 한적한 마을에서 좀 쉴까 봅니다. 시킴 입경 허가를 신청하면 한 1주일 걸린다죠?”

“1주일? 누가 그럽니까?

이곳 비망록에 그런 기록이 있더군요. 한글 메모였어요.”

, 전에는 그랬나 보군요. 지금은 몇 시간 만에 나옵니다. 내일 오전에 신청하면 오후에는 갱톡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시킴 같이 가요. 내일 오후에 가면 좋고, 안 되면 모레 갑시다. 어때요?”

좋죠.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습니다.”

 

대답은 덤덤하게 하고 헤어졌지만 내심 무척 기뻤다.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직 할 말이 많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님은 잘 들어줄 거라고 믿는 말들이 몰려나와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그러나 금방 불안해졌다. 스님도 사람인데 마음이 갑자기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갑자기 싸늘한 말을 뱉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 하시는 거 어때요? 듣기 싫어요. 지겹다니까요. 제발 그만 하세요. 시끄러워요. 닥쳐 개새끼야. 아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끝인데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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