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나 근거도 없이 민생단 이름을 덧씌워 동족을 처형한 ‘반민생단투쟁’
‘반민생단투쟁’이 종파적,패권적으로 흘러 수많은 무고한 항일독립운동가가 조선인에 의해 희생
‘민생단’은 외적으로는 조선인 민생고 해결과 자치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조선인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중협력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킬 목적으로 일제가 1930년 2월에 간도가 있는 동만주지역에 만든 친일반공적 성격의 단체였다.
‘반민생단 투쟁’은 일제의 주구들이 동만주지역 동만특위와 항일유격구내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일제의 이간질과 모략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반민생단투쟁’은 초기에는 성공하여 일제의 모략책동을 완전히 무력화시켰고, 1932년7월 일제는 민생단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그러나 동만주 항일유격구내 반민생단투쟁은 계속되었고, 더 극좌적으로 강경하게 진행되어 민생단과 아무 관련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민생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일제도 김동한 등과 비밀리에 ‘간도협조회’를 만들어 이러한 반민생단투쟁을 교묘하게 이용해 여러가지 음모를 벌였다. ‘간도협조회’는 “조선인의 항일투쟁은 조선독립과 무관하다, 조선인이 중국사람에 매여 왜 피를 흘려야 하는가”라며 사상모략공작을 했다.
‘반민생단투쟁’이 이렇게 극좌적 비극적으로 흐른 것은 ‘좌경 기회주의자’와 ‘좌경 패권주의자’들의 정치적 야망과 종파적 이해의 집착 때문이다. 또한 1935년2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가 내린 반민생단투쟁 전개 지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한 “종파 사대주의자”의 무자비성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에게는 “동만주 조선인의 70%, 항일무장세력의 80~90%가 민생단이며, 항일유격구가 민생단의 양성소이다”라는 근거도 없는 과장된 선동적 보고가 들어갔다.
이러한 좌경 종파적 반민생단투쟁은 일제의 모략책동과 같이 결부되어 동만주 항일유격대를 마구 짓뭉개 버렸다. 이러한 동만주 유격구내의 반민생단 투쟁은 1932년11월부터 약3년4개월이나 지속되었고, 민생단으로 몰려 떼죽음을 당한 사람은 2,000명이나 되었다. 이 영향으로 동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약화되었다.
1930년대 비극적 ‘반민생단 광풍의 회오리바람’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투쟁이나 연대투쟁에서 종파적 패권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이나 실천이나 구체적 사업에 근거하지 않고 종파적 입장과 종파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이다. 최근 민주노총의 분열상를 보며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