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용원 음악통신 286]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1928-2020)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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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286]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1928-2020)를 추모하며
  • 성용원 작곡가
    성용원 작곡가 klingsol@hanmail.net
  • 승인 2020.08.0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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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이 신체적 마비와 이상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곡을 발굴하고 가르치고 장애를 극복한 마치 베토벤의 '환생'과 같은 위인 레온 플라이셔.

‘왼손의 거장’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가 현지 시간 2일 향년 92세로 타계했다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가 3일 보도했다.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그의 아들 줄리안 플라이셔는 레온 플라이셔가 암으로 볼티모어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사인을 공표했다. 레온 플라이셔는 30대 중반에 찾아온 오른손 마비에도 연주자, 지휘자,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미국 음악계의 거장이다. 16세인 1944년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고, 1952년 미국인 최초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조지 셸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던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집’은 지금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는 명반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7년 볼티모어의 자택에서 레온 플라이셔

1950년과 60년대 초반 미국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로 맹활약하던 전성기에 오른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마비되는 시련이 그에게 닥쳐왔다. 37세에는 손가락이 아예 손바닥 안쪽으로 바짝 꼬부라진 채 펴지지 않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레온 플라이셔는 왼손이 호전되면 양손으로 연주했다. 특히 1982년 볼티모어 심포니와 협연했던 프랑크의 ‘심포니를 위한 변주곡’은 ‘17년 만의 재기’로 언론에 대서특필하면서 플라이셔의 양손 연주를 축하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다시 빳빳하게 굳었다.그는 오른손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있는 핑거링을 개발해 나갔다. 그렇게 10년 꾸준한 훈련을 통해 2004년 양손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돌아왔고,<Two Hands>를 발표했다. 양손으로 귀환했던 이 앨범은 미국에서만 10만 장이 넘게 팔렸다. 30년 만의 극복이었다. 그 이듬해 한국을 찾은 레온 플라이셔는 예술의전당 등에서 펼쳐진 연주회에서 ‘왼손’과 ‘양손’을 골고루 선보이며 바흐의 칸타타 208번 중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와 슈베르트의 ‘소나타 B플랫 장조’를 연주했다. 또 왼손으로는 현대작품 가운데 자신에게 헌정되었던 조지 펄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과 레온 커쉬너의 ‘왼손을 위하여’ 등을 연주했다. 브람스의 ‘샤콘느’도 왼손으로 연주했다.

레온 플라이셔와 그의 부인 캐서린 제이콥스

2006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예술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케네디 센터 명예회원이 되었으며 나다니엘 칸 감독이 연출한 디스토니아(dystonia)와의 투쟁을 다룬 영화 '투 핸즈'는 2006년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21세기 들어 볼티모어 피바디 음악원과 탱글우드 음악센터,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지휘와 후학양성에 힘을 쏟는 한편,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피아노 작품들을 찾아 소개하곤 했다. 꾸준히 오른손을 쓰는 재활에도 힘을 쏟아 2008년에는 80세 생일을 맞아 세계 투어 콘서트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하였다.독일 루르 페스티벌에 모습을 드러낸 고인은 부인 캐서린 제이콥스의 지휘에 맞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고, 실황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2000년 공영 라디오 NPR 인터뷰를 통해 레온 플라이셔는 “난 두 손을 모두 써 연주했을 때만큼 한 손으로도 음악과 내가 연결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라고 털어놓았다. 오른손을 쓸 수 없을 때 느꼈던 절망을 '인간의 승리와 존엄'으로 승화시켰던 숭고한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레온 플라이셔만큼 인류를 온정과 용기로 위로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었는가!한 사람의 비르투오소에서 자신과 같이 신체적 마비와 이상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곡을 발굴하고 가르치고 장애를 극복한 마치 베토벤의 '환생'과 같은 위인 레온 플라이셔. 부디 이제 모든 고통과 아픔이 없는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평화의 공간'에서 영원한 안식을 맞으소서. 그가 연주하는 바흐가 그의 타계와 맞물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거룩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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