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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2 ] 무상 스님

김홍성
  • 입력 2020.08.0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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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뜸해지자 계단을 밟고 사뿐사뿐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회계 장부 같은 알리멘트의 비망록을 안고 내려온 그녀는 옥상의 삭발이었다. 바쿠 위에 자주색 우모 재킷을 걸치고 자주색 계실 모자를 썼다. 영락없는 티베트 불교 승려의 모습이었다.

 

밑에 네 친구가 왔다.”

친구?”

주정뱅이 말이야. 내가 뭐랬어. 숙소를 가르쳐 주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안 가르쳐 줬어. 어떻게 여길 알았을까……. 어쨌든, 있다고 했어?”

아니, 있나 없나 본다고 했어. 그 친구는 벌써 한잔했더군. 술 냄새가 역해.”

체크인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어야지.”

네가 알려줬다고 생각했지. 젠장.”

방에 없다고 해 줘. 미안.”

 

쓰던 일기를 마저 쓰려고 볼펜을 들었으나 상념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흔들었다. 주로 술 생각이었다. 한 시간 쯤 버티다가 결국 일기장을 덮었다. 타파네 맥주를 좀 팔아 줘야 한다고 들이대는 놈이 오늘만은 그냥 자자던 놈을 이겼다.

 

미쉘은 진작 갔다. ‘내일 오전에 다시 오겠다는 메모를 냅킨에 휘갈겨 놓고 갔다. 제멋대로 사는 놈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아침 일찍 시킴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이미 말했는데도 오전에 온다니 기가 막혔다. 그래 너는 네 멋대로 살아라.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

 

손님이 뜸해지자 계단을 밟고 사뿐사뿐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회계 장부 같은 알리멘트의 비망록을 안고 내려온 그녀는 옥상의 삭발이었다. 바쿠 위에 자주색 우모 재킷을 걸치고 자주색 계실 모자를 썼다. 영락없는 티베트 불교 승려의 모습이었다.

 

그럴 듯한데 싶어서 내심 코웃음 치는 동안 그녀는 비망록을 카운터 맞은편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는 곧장 나에게로 다가왔다. 거동에서 이상스러운 기품이 느껴졌다. 티베탄 전통의상인 바쿠가 주는 기품인지도 몰랐다.

 

좀 앉아도 되나요?”

왜 안 되겠습니까.”

예절 바르고 기특한 이 몸이 몸소 일어서서 그녀가 앉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녀 또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앉았는데 앉음새가 단아했다. 내가 아는 그 여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맥주로군요. 캘커타에서는 주로 폭탄주를 마시지 않았나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리아 호텔 옥상에서 어울린 여러 사람들 중에 저도 있었어요."

"삭발했던 분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한동안 머리를 기르고 다녔죠. 만행 중에는 그게 편하다 싶었는데 아니더군요. 조심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밀었어요."

"그렇다면 ...... 스님이세요?"

". 중입니다. 절집에서는 무상 스님이라고 부르죠. "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과연 승려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흠결 없이 깨끗한 얼굴, 눈빛이 의외로 맑았다. 술 취해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시고 동작 그만 개새끼야, 차렷 개새끼야같은 말을 뱉을 여자 같지 않았다. 나이는 애매했다. 마흔 살? 쉰 살?

 

인생무상이라는 그 무상(無常) 말씀입니까?"

"다들 그렇게 묻죠. 없을 무()에 서로 상()입니다."

"저는 성이 김입니다. 기억하시는지는 몰라도 마리아 호텔에서는 동해상사 김 전무라고 했는데 그건 뻥이었죠.”

재미있는 분이군요. 떠돌이들은 다들 말하고 싶은 사연이 있죠. 하지만 그건 감추고 엉뚱한 허세나 부리고 거짓말만 하다가 지쳐서 어디론가 또 떠나게 되죠."

하하하, 역시 스님이십니다. 동해상사 김 전무가 다르질링에 와서는 실종된 딸을 찾고 있습니다. 한 번 그렇게 내뱉고 나니 그런 거짓말이 술술 이어져 나오더군요.”

흐흐흐........ ”무상 스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저는 술 취하면 아무나 붙들고 슬픈 사연을 만들어서 주절거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

스님은 다소 불안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다. 아차, 너무 나갔나? 싶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스님에게는 안 그러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러셔야만 할 겁니다.”

무상 스님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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