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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1 ] 딸

김홍성
  • 입력 2020.08.0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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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딸이 있었던가? 나에게도 딸이 크는 걸 바라보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의문스러울 만큼 아득했다. 아득하고 아득하여 전생인 듯했다.

 

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내 뒤에 따라오던 짙은 안개가 나를 앞질렀다. 광장에는 안개가 구름처럼 사람들 사이를 흘러다녔다. 까무잡잡한 현지인 관광객들은 그런 안개 속에서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혼부부, 핵가족, 대가족도 있었다.

 

한 줄은 벤치에 앉고, 한 줄은 그 뒤에 주르르 서도 모자라 벤치 앞에도 서넛이 털썩 주저 앉아야할 만큼 식구가 많은 대가족도 있었다. 그 많은 식구들을 향하여 카메라를 들고 있던 여학생이 내게 카메라를 내밀며 미소 지었다. 셔터를 눌러 달라는 거였다.

 

스마일. 하나, …….”

 

번창한 가족의 행복한 일원임이 자랑스러운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빛처럼 번졌다. 카메라를 돌려받으며 여학생은 매니매니 쌩큐하며 귀엽게 인사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누구 못지않게 소중한 딸이라는 뿌듯한 자부심 속에서 자라는 딸이 분명했다. 그러나 눈썹에 맺힌 안개 이슬로 인하여 울다가 웃었던 누군가의 얼굴이 연상 되었다.

 

나에게도 딸이 있었던가? 나에게도 딸이 크는 걸 바라보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의문스러울 만큼 아득했다. 아득하고 아득하여 전생인 듯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그러니까 내가 캘커타에 도착하기 반 년 전에, 딸은 영국의 사립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도 같이 떠났다. 둘 다 기어코 떠났다.

 

나도 공항에 나갔던가? 아무리 뒤져도 기억나는 건 강아지 코코뿐이었다. 딸은 출국장으로 들어서는 행렬 속에서도 코코를 안고 있었다. 딸은 코코를 데려가지 못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안타까워했다. 딸의 이모가 코코를 받아 안았다. 딸의 이모는 코코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눈물을 흘렸던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무렵의 기억은 거의 삭제되었다. 거의 날마다 독한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딸은 애들 말로 짱이었다. 지느니 죽는 게 낫다는 성깔로 싸우다 보니 중학교 때부터 짱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줄곧 격투기를 배웠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손에 붕대를 두르고 다니기도 했다. 어지간한 여자애들은 손을 아끼느라 정권 단련을 안 하는데 얘는 그걸 했다.

 

얘 나름대로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다른 애들은 체구가 부쩍부쩍 크는데 얘는 키가 안 크는 거였다. 체구에 눌리다 보니 상대를 단번에 제압하기 위한 기술을 연마해야 했다. 주변의 물건이나 연장을 들고 치거나 던지는 깡도 키워야 했다. 그 연장선에서, 그러니까 오직 맨손일 때를 대비해서 정권 단련까지 했던 거였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중학교 때보다 싸움이 잦았다. 타교에서 퇴학당한 짱들이 얘네 학교로 전학을 올 때마다 얘한테 맞짱을 뜨자고 했기 때문이다. '덩지 크고 성깔 더러운 년들'과 싸워서 매번 이기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강남에서 온 년'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화장실에서 붙었다. 막상막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밤중에 동네 버스 종점 주차장에서 붙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온 걔네 오빠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가운데서 고만고만한 계집애 둘이 붙었다.

 

주먹질 발길질에는 얘가 우세했다. 반면에 걔는 맷집이 셌다. 아무리 맞아도 꿀리지 않고 덤볐다. 걔는 코피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피를 본 야수처럼 오히려 악을 쓰며 덤비는 서슬에 얘는 지치기 시작했다. 그 때 순찰차가 왔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는 두 계집애들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돌던 오토바이들은 흩어졌고 얘들은 경찰에 의해 순찰차에 실렸다.

 

딸은 그 일로 인해 전보다 더 사나워졌다. 학교만 갔다 오면 당장 영국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울부짖었다. 타교 짱이 전학 올 때마다 싸우다 보면 언젠가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소연 했다. 대안학교를 제시했지만 그것이 국내에 있는 학교라면 안 간다고 했다.

 

한 발 더 양보해서, 영국식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도의 기숙사 학교로 가라고 했다. 인도의 유명한 기숙사 학교에 보내는 비용은 국내의 대안학교에 보내는 비용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딸의 유학을 핑계로 가끔 인도에 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딸은 막무가내였다. 미국이나 영국의 학교를 고집했다. 딸은 나에게 편지도 썼다.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장학생이 되겠다. 큰 이모처럼 변호사가 되어 아빠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 주겠다. 유학을 못 가면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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