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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8 ] 귀신

김홍성
  • 입력 2020.07.2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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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여기를 찾아 온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어. 우린 막 자려던 참이었지. 마침 이 방이 비어 있어서 널 이 방으로 데려 온 거야. 잘 들어 둬. 이 동네 개들은 밤이면 미친다. 특히 달밤에 더 미쳐. 어제 밤 그 개들의 눈에는 네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으로 보였을 거야.”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들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눈곱이 말라붙어 속눈썹들로 눈을 꿰매 놓은 것 같았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질러서 간신히 눈꺼풀을 벌렸다. 커튼 한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비좁은 방이었다.

 

일어나고 싶어서 눅눅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젖혔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편두통을 앓았을 때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목이 타고, 아랫입술 안쪽이 쓰라렸다. 개를 쫒기 위해 휘두르던 허리띠가 내 입술을 스친 기억이 났다.

 

이불 속에서 배를 더듬었다. 여권과 달러가 든 전대는 배에 붙어 있었다. 허리띠는 어쨌을까? 배 밑의 사타구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손목이 허전했다. 시계는 어쨌을까? 어디다 흘렸을까? 이 방에 있을까?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다주고, 찬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 때는 있었다. 나도 한 때는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혼자다. , 이 무서운 세상에 혼자라니!

 

락바 라마? 그는 시킴으로 떠났다. 그는 유스호스텔에 있었다. 여기는 유스호스텔이 아니다. 롱아일랜드도 아니다. 여기는 어딜까? 만일 내가 여기서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경찰이 오겠지. 경찰은 내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 연락 할 테고, 영사는 한국의 관할 경찰서를 통해 유족을 수배할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밤 꿈이 떠올랐다. 전신전화국의 철창이 떠올랐다.

 

다르질링의 국립병원에는 유족이 올 때까지 시체를 안치하는 냉동실이 있을까? 냉동실이 없으면 방부제 처리를 하거나 소금에 절여둘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원 확인만 하고 화장해 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화장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까무룩 다시 잠들자마자 누군가가 내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흐린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흐리게 보이던 얼굴이 서서히 명료해지자 그가 타파 구릉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리멘트의 식당 문을 두드렸던 상황이 스쳤다.

 

타파, 마실 물 좀 줘.”

물은 여기 있어. 여기 이 탁자에 이미 갖다 놨어.”

 

타파가 누워 있는 내 어깨 뒤로 손을 넣어 일어나 앉도록 도와주었다. 물병은 머리맡의 탁자 위에 있었다. 내 손목시계와 허리띠도 탁자 위에 있었다. 물병을 들고 물을 마시는데, 일어나 앉은 침대가 보트 같았다. 물이 차서 곧 가라앉을 것처럼 빙그르르 도는 보트 같았다.

 

천천히 마셔. 넌 좀 아픈 것 같다.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병원은 안 가도 돼. 아스피린 두 알이면 해결 될 거야. 술이 좀 과했던 데다 광장에서 만난 미친개들 때문에 혼났을 뿐이야.”

네가 여기를 찾아 온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어. 우린 막 자려던 참이었지. 마침 이 방이 비어 있어서 널 이 방으로 데려 온 거야. 잘 들어 둬. 이 동네 개들은 밤이면 미친다. 특히 달밤에 더 미쳐. 어제 밤 그 개들의 눈에는 네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으로 보였을 거야.”

귀신? 하긴 내게는 늘 술 마시다 죽은 귀신들이 따라 다니지. 개들은 내가 아니라 나를 따라 다니는 귀신을 보고 짖었을 거야.”

그래. 개는 귀신을 쫓는 동물이다. 어쨌든 밤늦게 다니지 마. 얼마 전에도 서양 여행자 한 명이 광장에서 개들에게 목을 물어 뜯겼어.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중태였지. 넌 운이 좋았던 거야.”

 

유리병에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탁자에 놓인 시계를 손목에 꼈다. 오전 10시가 좀 넘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롱아일랜드에 가서 체크아웃 할 시간이 충분했다. 타파에게 그 방에서 하루 더 묵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가능하지라고 했다.

 

타파 구릉을 따라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툭바를 시켰다. 우선 국물만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이 안 풀렸다. 갈증과 숙취를 풀기 위해 맥주를 한 병 달라고 했더니 타파는 카운터에 두 손으로 짚고 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

 

, 네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난다. 더구나 넌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어. 난 널 데리고 병원에 갈 생각이었어.”

환자 취급하지 말아줘 타파.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보니 맥주는 그만 두는 게 좋겠다. 대신 시원한 사이다를 한 병 줘.”

타파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병을 꺼내어 뚜껑을 땄다.

그럼. 그럼. 이게 낫지. 그런데 하나 묻자.”

물어봐.”

어제 누구와 마신 거냐?”

미쉘을 알지도 모르겠네. 광장 밑에 있는 학교의 영어 선생 겸 교감 ....... ”

 

맙소사. 그 주정뱅이에 오입쟁이 ! 그는 끝난 인간이야. 다르질링에서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주정뱅이들이나 걸인들 빼고는.”

주정뱅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오입쟁이라니?”

지금 마누라가 네 번 째 마누라다. 마누라가 되기 전에는 제자였는데 세 번 째 마누라가 버젓이 있을 때부터 몰래 정을 통했거든.”

미쉘에 대해서 잘 아는군.”

다들 잘 알지, 대부분 상대를 안 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알아? 혹시 다시 만나더라도 네가 여기 묵는다는 걸 말해서는 안 돼.”

어제 아일랜드에 묵는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왜?”

여기는 말해 주지 않는 게 현명할 거야. 말해 주면 대낮부터 찾아와서 마시자고 할 테니까.”

네 말을 들으니 다시 피곤해진다.”

그럼 이제 올라가서 좀 더 쉬는 게 어때?”

아냐, 차라리 좀 걷는 게 나. 아일랜드에 가서 체크아웃 하고 올 거야.”

 

일어서서 의자를 탁자 밑에 넣었다. 타파가 한 마디 더 했다.

이런 말을 하기 미안하지만 어제처럼 심야에 오면 곤란해. 한 번은 인정상 봐 주지만 두 번은 안 봐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약속한다. 난 원래 오늘 오후에 시킴으로 떠날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내일 혹은 모레 떠날까 싶어. 그동안 잘 먹고 푹 쉴 거니까 그런 걱정은 말아줘. , 방 줘서 고맙다는 말을 안 했군. 정말 고마워.”

알았어. 새삼스럽기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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