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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35 ] 론리 플래닛

김홍성
  • 입력 2020.07.27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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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오르자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씨킴 쪽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미쉘은 벤치에 앉아 능선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러시아 화가 로에리치의 그림입니다.
러시아 화가 NICHOLAS ROERICH 그림입니다.

 

안개가 스멀거리는 문 밖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다음날 오전에 침낭을 찾고 오후에는 시킴으로 떠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미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못났고, 나처럼 슬프고, 나처럼 술에 탐닉하는 인간인 미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 둘은 와이프 이야기가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둘 다 멍하니 안개 속에 투영된 각자의 쓰라린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나 보았다.

 

희뿌연 안개를 몰고 들어온 한 떼의 술꾼들이 앉을 자리를 찾았다. 주막집 여자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만 마시고 가라는 뜻이었다. 내가 먼저 일어섰다. 미쉘도 일어서서 왼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들을 뒤지며 돈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손수건이 나오자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가 좀 찾아봐 다오. 어느 주머니에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1백 루피 짜리가 한 장 있을 거다. 1백 루피면 내 술 값으로는 충분하다.”

 

,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미쉘의 1백 루피 짜리 지폐는 주머니가 아니라 양말이나 허리춤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쉘을 먼저 내보내고 술값을 치렀다. 우리가 마신 팩 소주는 모두 여섯 개, 나는 란 봉지를 더 사서 재킷 주머니에 넣고 주막집을 나섰다.

 

안개는 서서히 가시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장거리에는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미쉘은 길 건너 전봇대를 안고 비틀거리며 소변을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을 저대로 두고 그냥 가버릴까? 학교까지 데려다 줘야 하나? 좋다 만일 미쉘이 오줌을 다 누고 바지 지퍼를 제대로 올리면 데려다 주자.

 

그가 바지 자크를 올리고 길을 건너 왔으므로 그의 팔짱을 끼고 광장을 향해 올랐다. 몹시 숨차하는 그의 빨갛고 뾰족한 코끝에서 콧물이 달랑거렸다.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나를 옆에 붙들어 두는 유일한 도구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열다섯 살 때 말야, 우리 반 친구하구 가출을 했거든. 어딜 갔었는지 알아? 티베트로 갔어. 그때는 차가 없어서 걸어서 갔다구. 여기서 칼림퐁까지 하루, 칼림퐁에서 갱톡까지 또 하루……. 넷째 날 밤엔가 국경을 넘었어. 6월이었는데 우린 무지무지하게 추웠어. 다행히 거기 곰파가 있더군. 짬바 가루를 뜨거운 차에 타서 마셨지. 이튿날에는 염소국과 고기를 먹고. 우린 그 절에서 한 달을 살았어.”

 

국경을 어떻게 넘었냐?”

 

국경 초소가 있긴 했지만 그땐 별 문제가 안 됐어. 더구나 난 티벳 말도 잘 했거든. 우리 어머니가 티벳 여자니까. 난 외가가 있는 시가체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절에서 승려들이 하도 잘 해줘서 그냥 머물었던 거야. 외가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었구.”

 

하마터면 라마승이 될 뻔했구나?”

그럼. 그럼. 그런데 우린 거기서 돈을 훔쳤어. 다질링으로 돌아올 여비를 만드느라구.”

안 들켰냐?”

들켰지. 라마승들이 쫒아 왔어. 우린 붙들렸지. 그런데 말야, 겨우 그 돈 가지구 어딜 가냐며 돈을 더 주는 거야. 짬바 가루, 말린 염소 고기도 갖구 왔더라니까. 내 참.”

참 착한 중들이다.”

다른 여행들은 다 잊고 싶어도 그 여행만은 잊고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즐겁거든.”

같이 갔던 친구는 어떻게 됐냐?”

몇 년 전에 나갈랜드에서 반정부군의 총에 맞아 죽었어. 그 지역 치안책임자였거든.”

안 됐다.”

나갈랜드는 아직도 치안부재 상태야. 아니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내 형도 그쪽에서 사업을 하다가 그만 두고 작년에 돌아왔어. 그래서 다시 학교를 시작한 거야.”

 

광장에 오르자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씨킴 쪽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미쉘은 벤치에 앉아 능선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저기 저 능선 너머가 칼림퐁이야. 좋은 데다. 타고르도 여름철이면 칼림퐁에 와서 쉬곤 했다. 내 어렸을 때 우리 집 하녀가 칼림퐁으로 시집 갔어. 난 요즘도 가끔 그 집에 놀러 가지. 네게 그 집도 보여 주고 싶다. 주말에 같이 가서 며칠 푹 쉬다 오자. 누나는 음식 솜씨가 좋아. 물론 술값도 여기보다 싸다.”

 

칼림퐁. 안 그래도 시킴에서 나올 때 들려 보고 싶었던 곳. 그러나 술값도 싸다는 말에 질렸다. 도대체 이 친구는 얼마나 많이 마시고 싶은 걸까? 남녀 서양 여행자들 서넛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lonely planet' 출판사에서 나온 가이드 북 인디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미쉘이 그들에게 굿 이브닝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못들은 척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갔다. 미쉘이 그들을 향해 빈정거렸다.

 

과연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군. 겁쟁이 책벌레들.”

무슨 뜻이냐?”

예수쟁이들이 성경에 끌려 다니듯 론리 플래닛이라는 가이드북에 끌려 다니는 꼴이 우습지 않아? 저놈들 여행은 껍데기야, 알맹이가 없어. , 저기 또 론리 플래닛들이 오는군. 굿 이브닝 론리 플래닛. 헬로 굿 이브닝 론리 플래닛.”

 

미쉘은 마침 또 지나가는 서양 여행자들을 향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말려야 했다.

 

그만 둬 미쉘, 사람들이 쳐다 봐. 저길 봐. 폴리스도 너를 주시하고 있다.”

 

폴리스는 걱정 마. 경찰 서장이 우리 아버지 제자야. 게다가 난 이 도시에서 태어나 50년을 살았어. , 우리 한잔 더 하자. 집에 가기 전에 조금만 더 마시고 싶어. 근처에 좋은 곳이 있다.”

 

망설였다. 이쯤에서 이 녀석과 작별해 버리는 게 어떨까? 내일 시킴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이 있을 수가 없다고 지금 말할까? 하지만 이 녀석은 재미있다. 왠지 끌리는 구석이 있다. 저 주정뱅이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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