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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말기에 아시안 게임 레슬링 금메달을 획득한 레전드 송성일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7.17 14:34
  • 수정 2020.07.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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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선수는 죽기 일주일 전까지도 “모든 시합은 끝나봐야 아는 거에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악착같이 살아 볼 게요”라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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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격투기의 원조는 고대올림픽 때 판크라티온이다. 지금의 복싱과 레슬링을 합친 것 같은 격한 격투기인데 두 선수 가운데 한 선수가 기권 할 때 까지 경기가 계속된다.

최근에는 1976년 일본에서 벌어진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의 대결을 꼽을 수가 있는데 그 경기는 이노끼가 시종일관 링 바닥에 들어 누어서 경기를 하는 바람에 싱겁게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미국의 UFC를 시작으로 일본의 프라이드 FC와 K-1 그리고 한국에도 짐미 파이브 등이 잠깐 관심을 모으다가 사라졌다.

한국의 이종격투기 선수로는 2m18cm 거인 최홍만이 민속씨름에서 K-1으로 전향을 해서 잠깐 활약을 했었고, 최홍만의 뒤를 이어 김영현, 이태현 등 민속씨름 선수들과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 최용수, 지인진 그리고 유도선수 출신의 윤동식 등이 잇따라 뛰어 들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최근 UFC에서 활약하고 있는 페더급 정찬성, 웰터급 김동현 선수 만이 제 몫을 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90년대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100kg 급 대표선수 였던 송성일은 실력과 용모를 겸비한 천부적인 이종격투기 선수라는 평가를 들었었다. 그러나 송성일은 아깝게 26살이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송성일은 위암 말기의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서 그로꼬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만약 위암 말기라는 것이 밝혀졌다면 아시안게임 출전이 좌절되는 상황에서 송성일 자신이 위암이라는 것을 알고도 숨기고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나간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송성일 선수는 훈련을 할 때는 몰랐으나, 이상하게 훈련이 끝나고 나면 속이 쓰리고 아팠다.

그 때 마다 송성일 선수는 태릉선수촌에서 위장약을 타서 먹었다.

당시 유행하던 위장약 ‘겔XX’를 자주 복용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선, 후배 동료선수들로부터 우스갯소리로 ‘미스터 겔 XX’로 불리기도 했다.

남자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 대표였던 송성일은 평소 체중이 110kg 가까이 나갔고, 대회를 앞두고 서서히 체중을 빼다가 대회를 2~3일 남겨 놓고 마지막에 2~3kg을 더 빼서 컨디션을 조절해 왔는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체중이 저절로 빠지기에 오히려 반가워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체중조절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경기를 하기위해 매트에 올라 설 때 한계체중 100kg 보다 오히려 2kg 정도 모자란 98kg이었을 정도로 체중이 잘 빠졌다.

본인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알려지기로는 송 선수의 체중이 빠진 것은 그가 위암말기였기 때문이었다.

송성일 선수는 처음에는 자신이 위암말기의 위중한지도 모른 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위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금메달을 목표로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해왔었다.

송성일 선수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속이 자꾸만 더 아파왔다.

운동선수라 웬만한 고통은 참고 견딜 수 있는데, 당시의 고통은 마치 배속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것처럼 아팠다.

송성일 선수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행복을 누릴 사이도 없이 의사로부터 위암4기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위암이 1기도 2기나 3기도 아닌 말기판정을 받은 것이다.

만약 위암 초기이거나 1기 또는 2기 정도라면 본인도 모를 수 있겠지만 3기를 훨씬 지나 말기에 이르기 까지 본인이 몰랐다는 것은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운동선수들은 음식을 먹고 소화를 잘 시켜야 영양흡수가 잘돼서 힘을 쓸 수 있다.

송성일이 말기 암 판정을 받은 게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직후인 1994년 11월 경 이었고,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95년 1월29일 사망했으니 위암이 얼마나 진행이 됐는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성일은 중학교 2학년이던 14살 때 학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레슬링을 시작했다.

레슬링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경기도대회에서 우승해 일찍이 레슬링 선수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1987년 국가대표 팀 상비군으로 발탁된 뒤 한동안 운동을 포기한 채 웨이터, 선원생활 등을 하며 방황했지만, 1991년 어머니가 위암이 발병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마음을 다잡고 운동에 복귀했다.

송성일은 1991년과 1993년 아시아 레슬링선수권대회 그레코로만 형 90kg급 2연패에 성공 하면서 재기에 성공했고, 1년 만에 체급을 올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00㎏급 금메달을 딴 것이다.

송성일 선수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획득하자, 세계 레슬링 계에서는 2년 후에 벌어질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레슬링 선수 가운데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기도 했다.

송 선수는 워낙 호인다운 성격에 체격이 좋고 얼굴도 잘생겨서 당시 막 태동하려던 일본의 격투기 계에서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돈인 억대를 주고 스카우트 제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 격투기 히어로즈의 대표인 마에다 아키라 씨가 송성일 선수에게 레슬링을 그만하고 이종격투기로 전향을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었다.

마에다 아키라 씨는 재일동포다. 한국 이름은 고일명인데, 송성일 선수의 훌륭한 체격조건과 잘생긴 얼굴이 이종격투기 선수로 제격이라고 보고 스카우트 손길을 뻗었었다. 더구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까지 따자 실력, 용모, 배경 등 3박자를 고루 갖춘데 반해서 더욱 적극성을 보였다.

그런데 송성일 선수가 말기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안타까워 했다.

 

송 선수는 죽기 일주일 전까지도 “모든 시합은 끝나봐야 아는 거에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악착같이 살아 볼 게요”라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었다.

송성일 선수는 비록 요절을 했지만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아서 대전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안장 되었다. 이후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체육인으로는 송성일 선수에 이어 두 번째로 안장이 되었다.

송성일 선수가 요절을 한 후, 그의 집안에는 불행이 번지게 된다. 송성일 선수 어머니는 송 선수가 죽고나서 1년 후에 사망했다.

송성일 선수와 그의 어머니가 같은 위암에 걸렸어도 송 선수는 한창 젊은 나이인 만큼 암세포가 빨리 번졌고, 어머니는 송 선수보다 위암을 일찍 앓았어도 나이가 있어서 암세포가 더디게 퍼진 탓이었다.

또한 송성일 선수에게는 남동생(송성대)이 하나 있었는데, 그 남동생도 수년 후에 위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아무튼 송성일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위암 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발휘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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