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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마지막 선비정신을 찾아 나선 '별고을에서 파리로'

김은지 전문 기자
  • 입력 2020.07.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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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 심산 김창숙 생가와 한개민속마을 이승희 생가에서 칼 든 선비를 만나다

문화재청과 성주군청이 함께 하는 고택 종갓집 활용프로그램 ‘도포자락 휘날리며 별고을에서 파리로’ 2일차입니다. 가야산에 자리잡은 호텔에서 1박 후 든든한 아침을 먹고 심산 김창숙선생과 유림의 큰 스승이었던 한주 이진상 선생과 그의 아들 이승희 선생의 생가가 있는 한개민속마을로 향합니다. 

칼을 찬 선비라 불렸던 심산 김창숙선생의 생가인 사도실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입구 주차장에서 마을로 들어서면 오른편 산아래에 서원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라진 청천서원을 근래 다시 지은 것입니다.

얼마 걷지 않아 사당건물이 길가에 있습니다. 청천서원에 배향된 의성 김씨 동강 김우옹의 불천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동강 김우옹선생은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정여립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심산 김창숙은 동강선생의 13세손이 됩니다.

사당 옆은 청천서당입니다. 청천서원이 문을 닫자 심산의 아버지 김호림은 사랑방을 개조해서 청천서당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심산 김창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백세각을 찾아갑니다. 야성 송씨 문중과 힘을 합해 유림들의 독립의지를 대외적으로 올리고자 파리장서를 만들고 일제에 들키지 않기 위해 짚신으로 삼아 상해로 가게 됩니다. 후에 이 일이 발각되면서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붙잡히게 되는데 이것을 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합니다. 상해에 도착해서 김규식이 파리로 간 것을 알게 되자 그 내용을 전보로 부치고 이 후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1925년 8월 만주와 몽골의 황무지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 계획으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또 다시 유림들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합니다.1927년 병으로 영국조계에 입원했을 때 체포되어 국내에서 14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집행 정지가 되어 풀려납니다. 194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21년만에 성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45년 건국동맹의 책임자로 추대된 것이 발각되어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광복이 되어 풀려났습니다. 

심산이 고향으로 내려와 기거한 곳이 이 장소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성주의 경찰들이 거의 상주하며 감시했던 곳이죠.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의 민성균관대학을 설립해 1대 총장이 되었고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습니다.

의성 김씨 13세 종손인 심산선생의 생가는 그 명성에 비해 규모가 좀 작은 듯 합니다. 1901년에 불에 타서 이후에 만들어진 건물들입니다. 사당과 후에 청천사당으로 쓰인 사랑채가 떨어져있습니다.

안채는 다리를 못쓰는 시아버지를 평생 모셨던 둘째며느님이 최근까지 생활했던 곳입니다.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은 동강선생이 지은 속자치통감강목 판목을 보관했던 곳으로 청천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서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칼을 든 선비라 불렸던 실천적 유학자, 심산선생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하셨고, 독립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어간 시대의 마지막 선비 정신입니다. 

동강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김구의 글씨로 청천서당에 써주었던 것을 후에 서원에서 김구의 글씨를 가져와 모은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유림의 독립의지 2647자를 품고 상해로 향했던 심산의 발자취를 따라간 별마을 성주 사도실마을 이야기였습니다.

한개민속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큰개울, 또는 큰나루라는 뜻을 가진 한개는 산아래 논과 흙돌담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성산이씨 집성촌인 이 곳에서 딱 세 집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첫번째로 방문할 교리댁을 가는 길이 이 마을의 과거급제자들이 삼일유가를 했던 길로 광대들이 놀았던 광대걸로 이어집니다. 

교리댁으로 왔습니다. “이리 오너라”를 외치고 싶지만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이 익숙한 자리에 ‘신다’, ‘울루’가 적혀 있습니다. 신다와 울루는 형제로 힘이 세고 악귀를 잘물리치는데, 귀신들이 드나드는 문을 지키면서 남을 해치는 나쁜 귀신을 갈대로 꼰 새끼로 꽁꽁 묶어 호랑이에게 먹입니다. 그래서 문을 지키는 문신이 되었답니다. 파초가 시원스레 보이는 고택의 여름풍경입니다.

교리댁의 탱자나무입니다. 응와 이원조의 세째 아들을 양자로 보내 대을 잇게 한 집으로 마당에는 커다란 탱자나무가 있습니다. 제주목사를 역임해 선정을 베푼 응와 이원조에게 제주민들이 귤나무 세그루를 선물했는데, 반출이 금지되었던 귤나무 대신 탱자나무를 가져와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답니다. 

사랑채 뒤 작은 언덕에 사당이 있습니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1칸짜리 작은 사당입니다.

우리문화유산알리미 주강사님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참가자들의 모습입니다. 

두번째로 향한 곳은 응와 종택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이 집을 비우셔서 들어가볼 수는 없었습니다. 북비고택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던 돈재 이석문이 북쪽에 문을 내고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돈재의 아들 농서 이규진이 장원급제 했을 때 정조가 그에게  ‘너의 집에 아직 북비가 있느냐’는 말을 했다고 전합니다. 농서의 양자가 응와 이원조입니다. 응와는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지낸 문신이며 성리학 학자입니다. 

우비를 입고 산과 마을이 만나는 돌담길을 걸어갑니다.

한주 종택에 왔습니다. 조선말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은 응와 이원조의 조카이며 심산 김창숙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 아들 대계 이승희 선생과 손자 삼주 이기원, 백계 이기인 선생 삼부자 모두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승희선생의 생가입니다. 왼쪽부터 편액을 읽으면 한주, 대계, 삼주 마지막에 주리세가라고 적혀있습니다. 한주 종택의 자부심이 드러납니다.

사랑채 옆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수헌입니다. 앞마당에 소나무와 옆은 연못과 버드나무가 잘 어울어집니다. 

한개민속마을의 최고 전경은 이곳이 아닐까요? 

멋진 소나무와 어울어진 한수헌에서 좀 더 머물고 싶었으나 비가 점점 세지고 있습니다. 

 

한개 마을 영취산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한주종택에서 나와 마을입구로 걸어갑니다. 정다운 흙돌담길을 따라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1박2일의 성주여행은 점심식사 후 성주전통시장에서 장보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참가자들 모두 마지막 인사로 다음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또 만나자고 인사하고 헤어질 만큼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지방문화재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사단법인 우리문화유산알리미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한 프로그램은 다음 달에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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