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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희진 선생님을 추모하며

김홍성
  • 입력 2020.12.0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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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전차가 다니던 시대의 동성중학교 본관은 인접한 혜화동 성당처럼 붉은 벽돌로 지은 2층건물이었다. 누군가가 서대문 형무소 같다고 했을만큼 우중충하기도 했다. 동성학교 건너편 골목으로, 또 낙산 언저리로 과외를 다녔던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말까지 내가 그 학교를 다니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1966년 봄 첫등교 때, 교사들이 교문 안 비탈길에 서서 학생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그 중 한 교사는 비탈 맨 위의 큰 나무 밑에 따로 서서 시선을 먼 데다 두고 있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런 자세로 서 있던 교사, 그 분이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시인 박희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첫 시집 ‘실내악(1960)’과 두 번 째 시집 ‘청동시대(1965)’를 중학교 때 읽었다.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인 김형구 선생(1921-2015)도 동성학교의 미술 교사였으며 내가 그 집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외숙의 서재 겸 화실에서 그 시집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 때부터 내 책꽂이로 자리를 옮겼을 '실내악'의 첫 페이지 왼쪽 귀퉁이에는 ‘김형구 선생 혜존’이라고 조그맣게 한문으로 쓴 단정한 펜글씨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이 시집에 실린 ‘디오게네스의 노래’를 특별히 좋아했다.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어서 급우들에게 들려 준 일도 있다.

세 번 째 시집 ‘미소하는 침묵(1970)’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앞 서점에서 구입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효봉대종사송’이라는 장시에는 판사를 그만 두고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승려가 되었다는 효봉 스님 일대기가 나오는데, 나도 우선 엿장수부터 해 보고 싶어서 엿가위를 사들고 가출했었다. 그 때 곧장 범어사나 해인사 같은 큰 절을 찾아 갔더라면 나는 승려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에 다닐 때 처음으로 서울 동대문구 안암동의 선생님 아파트를 찾아 갔다. 23년을 봉직한 동성학교에서 이미 퇴직한 후였다. 교원공제조합을 통해 퇴직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근무 연한을 넘겼다고 했다. 독신이라서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연금이 나오니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시를 쓰는 길이 열렸다고 하셨다.

거실 한쪽에는 불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큰방에는 좌선을 하는 두툼한 방석이 따로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일과는 참선과 산책과 독서와 집필이었다. 선생님은 검소하고 단정한 수행자 같은 일과를 이어가면서 매 월 한 번 씩은 청중들 앞에서 자작시를 낭송했다.

구상, 성찬경 시인과 함께 시작한 시 낭송회 모임의 초기부터 한동안은 나도 서울 비원 인근의 공간사랑에 찾아가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청중이었다. 나는 그 모임이 400회(2013년) 이상 지속되리라는 상상을 못 했다. 도중에 시낭송 하는 자리를 대학로의 어느 카페 같은 곳으로 옮긴 일이 있었고, 그 때는 나도 한두 번 낭송 시인으로 초대 받아 참여 했지만 뭔가 삐걱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사랑에서도 간혹 그랬지만 유독 우리 선생님만 청중들이 경청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간혹 옆 사람과 소곤거리기며 한눈을 팔기도 하는 법인데 선생님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교사 생활의 습관이면서 시인의 자존심이기도 한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들도 없지 않았다.

선생님의 보문동 아파트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대학의 문예창작과 학생이었고, 무작정 시 쓰는 일에 빠져 있었다. 시 쓴 공책을 가지고 찾아갈 때마다 선생님은 집중해서 읽었고, 제법이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엉성한 부분을 아프게 지적하면서 언어와 형식에 대한 꾸준한 탁마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의 첫 시집 서문에서도 선생님은 그 점을 지적했다.

“즉, 그에겐, 수사학 면의 새로운 발명이나 남다른 수련에도 마음을 써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시란 새로운 언어미의 획득인 것이다. 시어의 정련과 조직에 있어, 그가 좀 더 힘써주길 당부하며, 나는 이제 이 졸필을 놓겠다.”

훗날 나는 언어나 형식을 다듬기보다는 즉시 구체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단순한 방법을 찾고 있으며 언어 자체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 문제를 다루는 시에 끌린다고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선생님은 침통한 어조로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짧게 당부했다.

그러나 내 시는 온통 센티멘털리즘이다. 네팔에서 9년을 살고 귀국한 직후에 낸 두 번 째 시집을 선생님에게 드리지 못한 이유도 그것이다. 선생님의 시론은 많은 시집에 그대로 드러나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언어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빠트릴 수는 없다.

나의 첫 시집에는 오자가 많았다. 교정을 본다고 봤는데도 오자가 너무나 많았다. 출판사는 필자를 믿었고 필자는 첫 시집을 내는 기쁨에 우쭐해서는 건성으로 읽었다. 특히 선생님의 서문에서 무려 12군데나 오자가 나왔다.

선생님은 오자를 일일이 수정하기를 원했다. 이미 나온 책이기에 정오표를 첨부하는 방안도 나왔지만 선생님에게는 안 통했다. 우리는 꼼짝없이 앉아서 식자 칼로 활자를 도려내어 오자 위에 붙여 나갔다. 5백 부나 되는 시집을 쌓아 놓고 페이지마다 일일이 오자를 고치는 일에는 선생님도 몸소 동참했다. 나는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선생님의 말년이 점철된 서울 우이동에서 나도 여러 해 같이 살았다. 선생님은 승강기 없는 연립주택 꼭대기 층에 혼자 살면서 거의 날마다 북한산으로 산책을 다녔다. 또한 산에서 내려오면 책상 앞에 열려 있는 창밖으로 산을 바라보다가 시를 썼다. ‘우이동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별명이 생겼던 그 무렵에 나온 시집이 ‘북한산 진달래’였는데, 그 시집의 초고가 들어 있는 대학 노트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진지하게 낭송하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 무렵 선생님 거실 소파에는 커다란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이지만 분위기를 좀 바꾸는데 필요할 거라며 친지가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했다. 두 개의 방은 물론 거실과 현관 밖까지 쌓여 있는 서적 더미와 거실에 들어서자 목도하게 되는 커다란 불두는 그렇다쳐도 소파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커다란 곰 인형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진달래 능선을 걷고, 약수터 산책도 하고, 솔밭 근처의 막국수 집에서 막국수도 먹고, 때로는 빈대떡에 막걸리도 마셨다. 우이동 시낭송회에도 몇 번, 소나무 연구회 모임에도 몇 번 같이 다녔다. 어느 날은 초대를 받아서 건너갔는데(아마 환갑이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보성 학교 재학 시절 인연들이 오롯이 모여 있었다.

시인 성찬경, 소설가 서기원, 그리고 그들의 은사였던 철학자 김규영 선생이 모여 있었다. 김규영 선생은 시집 ‘실내악’의 속표지 다음 장에 새긴 <내게 처음으로/생에의 외경을 깨닫게 하신/ 김규영 스승께> 라는 세 줄의 헌사의 주인공이셨다. 김규영 선생은 1백세가 멀지 않은 고령에 애제자 박희진의 부음을 듣고는 따님과 사위를 보내 문상하였다고 들었다.

우이동 시절에 이미 히말라야 오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에 빠져 있었던 나는 집에도 잘 없었다. 그러다가 아예 네팔로 이주하여 살 때에는 선생님께서 몇몇 제자들과 함께 네팔 땅으로 찾아오는 일도 벌어졌다. 우리는 그 때 네팔의 첫 국립공원인 랑탕 히말 언저리를 닷새 쯤 걸었다. 설산이 보이는 언덕에서 지팡이를 들고 내려오는 선생님의 모습은 이마와 얼굴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흰 머리와 흰 수염의 신선 같았다.

훗날 선생님이 보내준 시집에는 히말라야를 비롯한 네팔 여행에 관한 이야기 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시집은 다른 책이나 살림과 함께 카트만두의 내 거처에 그냥 두고 왔다. 금방 다시 갈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10 년이 지난 이제는 네팔 땅을 다시 밟게 될지 조차 알 수 없다.

귀국 후 10 년은 번개 치듯 번쩍거리며 장마철 흙탕물처럼 흘러갔다. 나는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겨우 두 번 만났는데, 한 번은 인사동 길가에서 우연히, 나머지 한 번은 7-8 년 전에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동성 가톨릭 동문 모임에 같이 초대되었을 때였다. 그곳에 갈 때는 내가 택시에 모시고 같이 갔는데 올 때는 모임의 요청에 의해 나만 남았다.

현관 열쇄를 노끈으로 묶어서 어깨에 메는 가방에 연결하고 다닐 정도로 이미 노쇠한 노인을 혼자 귀가 하게 한 그 밤에 나는 동문들 앞에서 히말라야에 관한 내 이야기를 떠들며 술을 마셨다. 그 날 이후로 선생님을 뵌 적이 없으며, 문상도 못 했고 장례나 사십구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백중이었던 엊그제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잠을 깼을 때 금년에는 유난히 많은 어른들이 앞을 다투며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희진 선생님의 시집들을 증정 받아 서가에 소장했던 외숙도 금년에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의 인연으로 내게 온 시집 '실내악'과 '미소하는 침묵'을 들추면서 박희진 선생님과 함께 했던 세월을 더듬고 나니 죄송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다. (2015년) 

 

시인 박희진의 첫시집 '실내악' 표지.
이 시집은 1960년에 500 부 한정판으로 사상계사 출판부에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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