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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과 간도특설대의 친일 반민족 행적

신영배 전문 기자
  • 입력 2020.07.12 10:07
  • 수정 2020.07.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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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시신은 일단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지만
민주당이 최근 발의한 '친일파 파묘법'이 통과되면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 될 수도...

710일 사망한 백선엽이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41만주국 육군 봉천군관학교9기로 졸업하고, 조선인 항일무장군 토벌 부대로 악명높았던 간도특설대의 만주국 헌병 중위로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수립이후 육군 정보국장과 국군1사단장 시절에는 여순항쟁 진압, 빨치산 토벌군내 좌익인사 숙군작업을 지휘하며 승승장구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333세의 나이로 초대 육군대장이 되었다.

백선엽의 이력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고 해방이후에는 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며 국립묘지 안장을 적극 반대한다.

백선엽의 시신은 일단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만 민주당이 최근 발의한 '친일파 파묘법'이 통과되면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 될 수도 있다.

백선엽의 친일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좀 알아보자.

백선엽은 청년시절 간도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장준하 선생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장준하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광복군에 자원한 반면, 백선엽은 당시 가장 확실하게 출세가 보장된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백선엽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특설대에서 3년간 일본군 군관장교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괴뢰뢰정부 만주국이 조선인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서 1938년  창설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다. 당시 만주의 조선독립군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만주국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을 소탕하기 위해서 특별히 창설된 부대였고, 대대장 등 간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간도특설대의 군사활동은 잔악하기로 유명했고 실제 항일무장독립군 궤멸에 큰 기여를 했다. 또 이들은 민간인도 잔인하게 학살하고 보복을 자행했다. 백선엽을 비롯하여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장교는 모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해방후 악명높았던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들은 그대로 국군지도부가 되었고, 항일무장 유격전 소탕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4.3항쟁' '여순항쟁' 등을 토벌하는 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분단 현대사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음의 '간도특설대가(歌)'는 많은 걸 말한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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