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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19 ]거짓말

김홍성
  • 입력 2020.07.11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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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사람은 그의 딸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 자신이 가족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가족 모두가 싫고 집이 싫었다. 회사가 싫고 나라가 싫었다. 애인도 친구도 지겨웠다. 타락과 방종으로 이어지는 삶에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거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더라도 멀리, 아주 멀리 가서 죽고 싶었다.

 

취하면, 취한지도 모르고 취한 기이한 상태가 되면, 처절하거나 비통한 이야기를 꺼내어 과장하고 각색하는 자가 거기 있었다. 창작한 대사를 도취 상태로 읊는 배우가 거기 있었다. 상대의 관심을 끌어내고, 자신에게 몰입하게 하고, 동정과 위로를 얻는 자가 거기 있었다. 그는 붉은 술을 마시면서 펨 도마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섰다고 펨 도마에게 말하고 있었다. 딸은 펨 도마 또래이며 펨 도마와 많이 닮았다고도 했다. 기독교 계통의 봉사단 일원으로 석달 동안 네팔에 체류하면서 임무를 마친 딸은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한 후 캘커타에서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두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그림엽서에는 다르질링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국내에서 무작정 소식을 기다리다가는 미칠 것만 같아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캘커타를 거쳐 다르질링으로 왔다고 했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거짓말이 즉흥적으로 나왔다. 펨 도마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경청했다.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적절한 질문을 던져서 그가 거짓말을 술술 이어가게 했다.

 

사진을 여러 장 가지고 왔는데 다르질링에 도착하자마자 수첩과 함께 분실했다. 딸의 사진을 다시 보내 달라고 가족에게 전화를 해 놨으므로 사진은 곧 다르질링에 도착할 것이다. 사진이 도착하면 경찰서에 찾아가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을 만들어 곳곳에 붙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르질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온 지 몇 달 안 되었다는 펨 도마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걸 즐기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술 마시는 사내와 대화하는 딸이 마땅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두 번인가 불려가서 주의를 받았던 펨 도마가 마침내 돌아간 후에 그는 제법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빈 술병을 흔들어 보고서야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는 배낭을 던져 놓았던 방이 어딘지를 기억하기 어려웠다. 긴 복도 좌우에 늘어선 대여섯 개의 나무 문 중에서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를 몰랐다. 갑자기 출렁다리를 건너올 때처럼 어지러웠다. 결국 펨 도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거짓말 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천재성을 미끼로 환심을 사려고 한다. 그러나 간혹 처절하고 비통한 소설을 써서 공감을 얻고 동정을 사려는 자들도 있다. 그는 언제나 후자의 경우이다. 전자에 속하는 부류는 그나마 건강한 편이다. 후자는 어리석고 약하다 못해 깊은 병이 든 자다.

 

실종된 사람은 그의 딸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 자신이 가족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가족 모두가 싫고 집이 싫었다. 회사가 싫고 나라가 싫었다. 애인도 친구도 지겨웠다. 타락과 방종으로 이어지는 삶에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거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더라도 멀리, 아주 멀리 가서 죽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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