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이지의 노래 [ 15 ] 룸부 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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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15 ] 룸부 셀파
  • 김홍성
    김홍성 ktmwind@naver.com
  • 승인 2020.07.0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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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부는 그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18세에 장가 든 이후 60세가 되도록 사방 1백 리 밖에는 안 나가 보았다고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모두가 그 마을에 있기 때문에.
ⓒ김홍성

 

롯지의 주인 룸부 셀파는 고모부를 너무나 많이 닮았다. 천 년 만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인해 보이는 뼈대와 질긴 근육, 불거진 광대뼈와 날카로운 눈, 쇳소리가 나는 음성……. 그러나 웃는 모습은 더 없이 순박해 보이는 것까지 닮았다. 그것은 몽골리언의 공통적인 특질일지도 모른다.

 

룸부 셀파는 60세라고 했다. 고모부는 그 나이에 이미 노쇠해졌지만 룸부 셀파는 나이답지 않게 건장했다. 그는 아직 해지기 전인데도 유쾌하게 취해서는 부인에게 술 한 병 더 가져오라고 했다.

 

좋은 술이다. 밑에 내려가면 맛볼 수 없다. 이거 한 병은 공짜다. 하지만 더 마시려면 돈을 내야해. 안 그러면 내가 마누라한테 혼나. 안 그래 임자?”

룸부 셀파는 그러면서 동갑내기 부인의 커다란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룸부네 술은 꼬도 락시. 그러니까 꼬도라고 부르는 일종의 기장으로 만든 소주였다. 우리나라의 안동 소주보다 순도는 좀 떨어지지만 곡식을 원료로 한 증류주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룸부는 그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18세에 장가 든 이후 60세가 되도록 사방 1백 리 밖에는 안 나가 보았다고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모두가 그 마을에 있기 때문에.

 

산 좋다. 밥 좋다. 술 좋다. 마누라 좋다. 친구 좋다. 하늘 좋다. 나무 좋다. 부처님 있다. 헤헤헤......”

술 취해서 바보처럼 웃는 룸부를 보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고모부를 떠올렸다.

 

고모부는 환갑 좀 넘어서 두 번 째 온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무렵에 찾아갔을 때 고모부는 아파트 문간방 침대 위에서 벽을 보고 모로 누워 있었다. 고모부의 얼굴로 내 얼굴을 디밀고 보니 고모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서 눈물은 어찌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눈물로 죄를 씻을 수 있다면 고모부는 어떤 죄도 남김없이 씻고 세상을 떠났을 거다.

 

고모부는 걸핏하면 고모를 때렸다. 고모는 눈 밑에 멍이 들어서도 일은 쉬지 않았다. 한 손에는 달걀을 들고 얼굴에 굴리면서도 다른 한 손에는 걸레를 쥐고 방바닥을 닦던 고모 ...... 고모부는 외아들도 장작개비로 마구 두들겨 팼다. 술 취해서 패고, 맨 정신에도 팼다. 하도 패니까 저러다 맞아 죽겠다 싶었던 고모는 갓 중학생이 된 형을 서울에 하숙을 구하고 유학을 시켰다.  

 

고모부네 옆집에 살았던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오십 리 밖의 다른 면으로 이사를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의 누이가 노상 남편에게 매 맞고 사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고모부는 북의 토지개혁 직후에 월남하여 경찰관이 된 분이었는데 하필이면 지리산 일대로 배치되었다. 고모부는 휴전 직후에 남원 경찰서에서 퇴직했다. 전쟁을 치른 군인과 경찰은 비록 몸은 멀쩡하다고 하더라도 트라우마로 인한 상이군인이라고 해야 옳다. 전쟁 통에 간신히 살아남은 시민들도 사실은 상이 시민이라고 봐야 한다.

 

이제 고령에 이른 분들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은 분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 아버지도 전장에서 여러 번 죽을 뻔 했다고 들었다. 칠흑 같은 밤에 비는 억수로 퍼붓는데 인민군과 국방군이 조우하여 뒤섞여버린 진창에서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우리 고모부는 또 지리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내가 저녁식사를 끝내자 룸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누이동생 집에 놀러 가자며 일어섰다.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손전등을 켜들고 따라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룸부의 누이동생은 부엌에서 술 고리 밑에 불을 때고 있었다. 구리로 만든 술 고리에서 훈훈하고 향기로운 꼬도 락시 냄새가 솔솔 났다.

 

술 고리를 얹은 화덕에서 타는 불꽃에 비친 늙은 남매의 얼굴은 사제처럼 경건해 보였다. 좁지만 아늑한 부엌 바닥에 나무 깔판을 하나 씩 깔고 앉아서 금방 내린 따뜻하고 향기로운 술을 흡족하게 마신 덕분에 잠결이 곱고 산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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