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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12 ] 팔루트

김홍성
  • 입력 2020.07.04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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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팀들의 식탁에 눈부신 칸델라가 켜졌다. 불빛에 비친 서양 팀들의 식탁은 아주 풍성했다. 짐꾼들이 풍부한 식량을 지고 왔으며 쿡이 따라다니며 요리하기 때문이었다. 문득 칸첸중가 트레킹 팀에 쿡으로 합류한 락바 라마가 떠올랐다.

ⓒ김홍성

 

8시쯤 팔루트를 향해 떠났다. 뒤따라 온 일본 청년들이 앞질러 갔다. 산등성이 길은 완만했다. 심한 비탈은 거의 없었다. 응달진 곳에서는 잔설(殘雪)을 밟고 걸었으며 때로는 랄리구라스 숲 사이를 걸었다. 우리나라 철쭉이나 진달래와 흡사한 랄리구라스의 붉은 꽃망울에는 하얀 눈꽃이 붙어 있기도 했다.

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파래서 머리에 물을 이고 걷는 듯했다. 산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듯한 칸첸중가를 향해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았다. 산닥푸에서 팔루트까지는 21킬로미터인데 겨우 4킬로미터를 걸었을 때였다. 남은 구간 17킬로미터를 걷는 중에 아무래도 비를 만날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오후가 되자 운무 때문에 시야(視野)5미터도 안 됐다. 일본 청년들은 서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조를 맞추어 걸었고 나는 그들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북사면(北斜面)에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 운동화가 젖어 발끝이 시렸다.

다시 한 시간 이상 걸어서 사발그람(Sabhargram)도착. 지붕이 없고 벽도 무너져가는 집이 있었다. 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지도를 보니 능선을 따라 곧장 나 있는 길은 팔루트로 이어지고, 능선 동쪽 사면으로 난 길은 몰래이로 이어졌다.

팔루트에 도착한 때는 오후 다섯 시였다. 치워놓은 눈 더미들 가운데 서 있는 건물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산장이었다. 양철 지붕을 씌운 단층 목조 건물의 넓은 홀에 식탁이 두어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촛불이 켜져 있는 식탁에 서양 트레킹 팀의 심부름꾼들이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매니저가 안내해 준 방에는 침대 여섯 개 외에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의외로 침구가 깨끗했다. 두툼한 담요도 두 장씩 배당되어 있었다. 저녁을 주문해 놓고 뜨거운 차를 마셨다. 어두워지는 창으로 운무가 한기와 함께 스며들어 왔다. 어디서 쇠 방울 소리가 뎅그렁뎅그렁 울렸고 작은 새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서양 팀들의 식탁에 눈부신 칸델라가 켜졌다. 불빛에 비친 서양 팀들의 식탁은 아주 풍성했다. 짐꾼들이 풍부한 식량을 지고 왔으며 쿡이 따라다니며 요리하기 때문이었다. 문득 칸첸중가 트레킹 팀에 쿡으로 합류한 락바 라마가 떠올랐다.

서양인들의 식탁에서 퍼져 오는 불빛에 의지하여, 거기서 풍기는 닭튀김 냄새를 반찬 삼아 맨밥에 감자볶음과 녹두국을 먹었다. 흔히 달 밧또는 달 밧 떨커리라고 부르는 이 메뉴는 우리나라의 옛날 식당 메뉴인 백반 정식 같은 것이다. 달은 죽 형태의 녹두국, 밧은 흰쌀밥, 떨커리는 감자나 배추를 마살라로 볶은 반찬류의 총칭이었다. 나는 그래도 먹을 만 했는데, 여전히 고산증에 시달리는 일본 청년 몇은 몇 술 뜨다 말았다.

밤중에 손전등을 들고 화장실에 가보니 엉망이었다. 꽁꽁 언 똥오줌이 변기에 차고 넘쳐 발 딛을 틈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운무를 헤치고 멀찍이 나가 눈밭에 앉았다. 전지를 아끼려고 손전등을 끄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다가오는 손전등 불빛이 뿌옇게 보였다. 나는 손전등을 다시 켜서 원을 그려 보였다. ‘여기는 이미 내가 차지했다. 너는 다른 데로 가라.’는 뜻인 줄 알았는지 그쪽 손전등 불빛의 각도가 꺾였다.

운무, 어둠, 고요……. 산등성 너머에서 치솟는 바람 소리가 음산하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뿌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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