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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4 ] 광장

김홍성
  • 입력 2020.06.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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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나와 노는 아이들,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깡마른 노인들, 구멍가게 안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들, 누추한 거처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창가의 화분들, 그리고 시래기와 청국장을 끓이는 냄새 …….

 

골목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바람이 불어와 운무를 헤칠 때마다 광장에 늘어선 영국식 건물들이 드러났다. 대영제국 시대의 유물인 그 위압적인 건물들은 유령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광장에 들어서자 광객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좁은 선실이 갑갑해서 바람 쐬러 갑판에 나온 선객船客들 같았다.

신혼부부도 있었고, 일가족도 있었다. 커다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 다소 수다스런 태도, 그리고 유난히 추위를 타는 것으로 보아 캘커타를 비롯한 벵골 지방 사람들이지 싶었다. 그들은 두꺼운 털옷에 털모자까지 쓰고도 덜덜 떨고 있었는데, 정말 추워하는 게 아니라 추위를 신기하게 여기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광장 한 쪽에 놓인 벤치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엉덩이만 걸쳤다. 뿌연 운무 속에서 관광객들에게 조랑말을 태워 주는 티베탄 마부도 보였고, 밀크 티를 보온병에 담아 들고 다니며 파는 아낙네들도 보였다. 관광객들을 따라 다니며 손을 내미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소녀가 내 앞으로 걸어와서 하얀 손바닥을 내밀었다. 속눈썹에 운무로 인한 이슬이 송송송 맺혀 있는 소녀였다. 손바닥 위에 동전 몇 개를 올려놓자 재빨리 감아쥐고 달아나는 소녀를 본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잔돈이 없었다. 달러는 전대에 넣어 배에 차고 있었으며 잠바 안주머니에 고액지폐가 몇 장 있었을 뿐이다. 줄 게 없다고 잠바 겉주머니를 털어 보인 것이 잘못이었다. 한 소년이 내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소년들도 뒤질세라 손을 넣으려고 덤볐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짐짓 눈을 부라린 후 화난 듯이 벤치를 떠났다. 등 뒤에서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광장을 벗어나는 길은 수없이 많았다. 특히 광장 북쪽 동산을 한 바퀴 도는 순환도로에는 어디서든 비탈로 내려설 수 있는 샛길들이 뻗어 있었는데 그날 접어든 길은 티베탄 난민촌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운무에 푹 젖은 룽따들이 우두커니 서있는 난민촌 판잣집들은 이상스레 낯이 익었다.

 

길가에 나와 노는 아이들,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깡마른 노인들, 구멍가게 안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들, 누추한 거처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창가의 화분들, 그리고 시래기와 청국장을 끓이는 냄새 …….

 

티베탄을 비롯한 히말라야의 몽골계 민족들도 우리의 청국장이나 시래기 같은 음식을 즐겨 먹는다는 것, 그리고 히말라야 산촌에서 자란 몽골계 청년들이 영국군 용병이 되어 홍콩에 주둔하면서 가장 그리운 고향 음식으로 끼니마 즉 청국장을 꼽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운무 속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티베탄 난민촌은 내 나이 다섯 살 무렵의 우리 동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했다. 휴전선 부근의 수복지구收復地區던 우리 동네도 한국 전쟁의 난민촌이었다. 난민들은 대체로 깡통과 판자로 지은 집에 살았다. 하수도도 변소도 없었기에 큰길도 뒷골목도 언제나 오물로 질척거렸다.

애들 우는소리와 여자들의 악 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이면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기도 했으며, 어느 날 아침에는 뒷집 아줌마가 양잿물을 사발로 들이키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흉흉하기만 한 동네는 아니었다. 마을을 한 걸음만 벗어나면 들판이 나왔고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고모네 여인숙은 시냇가로 가는 들판 초입에 있었다. 마당이 넓었다. 고모네 마루에 앉으면 마당 가득 널어놓은 흰 이불 홑청들 너머로 청계산이 보였다. 청계산 능선 위로는 이불 보따리 같은 구름이 흘러가곤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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