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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의 스타박스 130] 김연경은 계획이 다 되어 있었구나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6.0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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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생명은 지난 시즌을 끝내고, 현대건설에서 FA로 풀린 쌍둥이 동생 국가대표 세터 이다영 선수를 잡았다. 쌍둥이 동생 국가대표 세터 이다영과 언니 이재영이 한 팀에서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이다.

흥국생명은 이미 외국선수로 라이트를 맡아볼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루시아 프레스코(루시아로 등록)와 계약이 되어 있어서 이재영 루시아 양 날개는 국내 최강이었다.

그리고 국가대표 센터 이주아와 백전노장 김세영(1m90cm) 선수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국가대표 리베로 김혜란 선수가 은퇴를 했지만 IBK로부터 조송화 선수의 보상 선수로 박상미 선수를 데려와서 보강했다. 흥국생명은 세터, 레프트, 라이트, 센터 등 포지션 별로 국내 최강이다.

그런데 월드스타 김연경이 가세한 것이다.

김연경은 흥국생명으로 11년 만에 리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연봉(6억5000만원)에서 후배들을 위해 3억 원을 스스로 깎는 희생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연경이 유럽과 중국으로부터 거액의 연봉제시를 마다하고, 흥국생명으로 리턴한 이유는 올림픽 메달 때문이다.

김연경은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었고,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일본에 패해(4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8강전 네덜란드에 패해(1대3) 8강에 그친 한을 2020 도쿄올림픽에서 풀기 위해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1988년생으로 한국나이로 33살인 김연경에게, 34살이 되는 2021년에 치러지는 2020 도쿄올림픽은 마지막 도전인 셈이다.

어쨌든 김연경의 가세로 흥국생명의 전력은 막강해 졌다. 이제 흥국생명이 패하면, 곧바로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흥국생명의 전력은 역대 여자배구 최강인가?

184연승 기록의 주인공은 국세청 대농 그리고 미도파다. 3팀이 모두 184승을 세운 것이 아니고, 1969년 국세청으로 시작해서 대농으로 이름을 바꿔 나중에 미도파로 존속했던 단일팀이 세운 기록이다(자료= 미도파 배구단 로고). 
184연승 기록의 주인공은 국세청 대농 그리고 미도파다. 3팀이 모두 184승을 세운 것이 아니고, 1969년 국세청으로 시작해서 대농으로 이름을 바꿔 나중에 미도파로 존속했던 단일팀이 세운 기록이다(자료= 미도파 배구단 로고). 

미도파의 184연승은 국내 구기종목 최고기록

국내 여자배구에서 무려 184연승을 올린 팀이 있다.

그 기록은 국제배구연맹의 통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주 희귀한 기록이다. 184연승 기록의 주인공은 국세청 대농 그리고 미도파다. 3팀이 모두 184승을 세운 것이 아니고, 1969년 국세청으로 시작해서 대농으로 이름을 바꿔 나중에 미도파로 존속했던 단일팀이 세운 기록이다. 미도파가 마지막으로 패한 것이 1985년이니까 무려 16년 동안 전승을 거뒀다.

그 사이에 한 두 차례 패하기는 했지만 팀의 '베스트 6'가 거의 모두 국가대표로 차출된 상태에서 대한배구협회의 간청으로 할 수 없이 출전한 대회였다. 따라서 협회에서도 그 대회 기록(패배)은 인정하지를 않고 있다.

국세청은 1969년 추계리그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세청에는 김은희라는 당대 최고의 세터에 레프트 이인숙 그리고 센터에 김영자 선수가 버티고 있어 천하무적이었다.

국세청은 대농과 미도파로로 이름이 바뀌면서도 패배를 몰랐다. 그동안 국가대표 세터만 해도 유경화, 윤영레, 이운임 등이 거쳐 갔고, 레프트 주 공격수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과 나중에 서울 대에 진학한 박인실 여자 배구사상 가장 파워가 좋았던 김화복 등 국가대표 공격수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항상 팀 공격의 70퍼센트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리고 라이트 공격수로는 이정자, 곽선옥, 김옥순 등이 있었고, 박미희 정영운 등 센터들이 A,B 퀵 등 빠른 공격으로 상대 코트를 유린했다.

184연승을 올리는 동안 고비도 여러 차례 있었다.

미도파 이창호 감독의 영원한 라이벌 전호관 감독이 이끄는 현대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호남정유, 동일방직, 산업은행, 태광산업, 도로공사 등도 나름대로 선수를 보강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1년 2월 대통령배배구대회 현대전은 사실 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이 연승 행진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 팀은 국가대표 레프트 이은경과 라이트 겸 센터 김영숙 그리고 센터 김종순 등 준 국가대표 멤버 였다.

미도파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얼떨결에 2세트를 먼저 내줬다. 그러나 3세트부터 전열을 정비한 미도파는 이후 내리 3세트를 따내 3대2 역전승을 거두고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포츠계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1985년 광주에서 벌어진 종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무슨일이든지 좋지 않을 일이 생기려면 조짐이 있기 마련인데, 김화복이 선경과의 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다가 공을 밟고 넘어져 부상을 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선경 멤버는 현대를 능가할 정도로 막강했다. 국가대표 센터 김애희에 센터와 레프트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진춘례가 버티고 있었다. 1세트를 대접전 끝에 18대20으로 내 준 것이 뼈아팠다. 만약 1세트를 이겼다면 200연승도 가능했다는 것이 당시 배구 인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선경에는 비록 패했지만 이후 연승을 거둬 결국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1세트를 이긴 선경 선수들은 "이거 한번 해 볼 만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갖고 있는 실력의 120퍼센트를 발휘했다. 선경선수들이 뜻밖에 펄펄 날자 오히려 미도파 선수들이 주눅이 들어 2세트도 19대21로 내줬고, 마지막 3세트에서도 듀스까지 가다가 15대17로 패했다.

영상= 식빵언니 김연경 유튜브(바로 가기)

184연승의 비결

당시 184연승이 끝난 후 이창호 감독이 연승 비결을 공개 했었다.

하나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물론 스카우트 비는 다른 팀에 비해 많지 않았지만 그밖에 체육관시설, 음식, 교통수단 등의 훈련 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구사 할 수 있는 배구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는 바로 자신이 구사 할 수 있는 배구 즉 수비 배구다. 이창호 감독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 여자배구에 금메달을 안긴 다이마쓰 신봉자다. 다이마쓰가 맡고 있던 유니티카 팀에서 코치연수를 했기 때문에 다이마쓰의 '수비 배구' '혼의 배구'를 전수 받았다. 따라서 모든 선수가 수비가 최선의 공격이라는 생각으로 훈련하고 '공을 자기 코트에 떨어트리면 죽는다'는 정신력으로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좀처럼 상대팀이 이기기가 어려웠다.

세 번째는 당시는 실업팀이 특정 여고 팀과 자매결연으로 선수를 뽑았는데, 자매결연 팀인 광주여상 남성여고 등에서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해주었다.

2020 흥국생명과 1980년대 미도파

김연경이 가세한 흥국생명의 전력은 1980년대 무서운 연승행진을 하던 미도파(국세청 대농)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배구가 랠리포인트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외국선수가 뛰고 있는 것이 변수다.

또한 IBK 기업은행 등 다른 5개 팀 전력도 만만치가 않다. 흥국생명이 방심하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전력이다.

흥국생명이 우승전력인 것은 틀림없지만 20연승 30연승 이상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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